2015. 7. 25. 15:12
| Comment





for my dear. spswspsw 2.


장서쾌전 (aka. 방자전) 








1. 



“백기야.”

“네, 아버님.”

“네가 이제 열일곱이 되는게 맞더냐.”

“네, 그러하옵니다.”

“네 할아버님 상을 치르느라 네 관례가 늦었다. 또래에 상투를 틀지 않은 사내는 너 밖에 없지 않던? 이번 정월에는 꼭 길일을 잡아 네 관례를 치를 것이야. 장서쾌의 장남이 늦은 관례를 치릅니다. 부디 오셔서 축하해주십시오. 가깝게 지내던 벗들과 귀한 손들에게 이리 알리고 말야... 콜록 콜록....”

“아버님, 저는 관례 따위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우선 아버님이 어서 병상에서 일어나시는 것만이 소자 소원이옵니다.”


밭은기침을 하던 장서쾌는 자신의 발치에 무릎 꿇어 앉은 사내아이의 윤 나는 길게 땋아 내린 까만 머리를 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에 저 머리를 틀어 올려 의젓하게 갓을 쓴 모습을 볼 수 있는 행운이 과연 남아있을까. 장서쾌는 목이 메여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백기야. 너도 알다시피 임진년과 병자년, 이 나라가 큰 난리를 겪으면서 전국에 서적이 동이 났다. 네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가업인 이 세책점을 어떻게든 살려보려 애를 썼다만 일을 다해내지 못하고 결국 이렇게 병까지 얻었으니. 내가 이대로 세상을 등지면 이 세책점은 바로 정리 하거라.”


“아버님, 어찌 선대 때부터 이어진 가업을 제 대에서 닫는 불효를 감당하라 하십니까.”

“세책점을 닫을 뿐이지, 백기 너는 장서쾌의 아들. 새로운 서쾌 백기다. 답해 보거라. 서쾌는 어떠해야 하느냐.”

“... 책을 많이 읽고 또 가까이 해야 합니다.”

“틀렸다. 서쾌는 책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서쾌는 책을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을 두루 꿰뚫는 안목과 인맥이 있어야 해. 이제 막 천자문을 익히기 시작한 여덟 살 남짓한 꼬마 도령부터 평생 수많은 책을 읽어 온 백발 노선비까지 그 누구와도 책을 주제로 막힘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게 서쾌다. 

너는 좋은 서쾌가 될 거다. 다만 어렸을 적부터 예민한 기질을 숨기지 못하고 사람을 가리는 게 걱정이라면 걱정일 뿐.” 


장서쾌는 흐릿해지는 눈을 들어 자신의 작은 방을 빼곡히 채운 귀한 책들을 살폈다. 끝내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못해 제 주인을 찾아주지 못한 책들이 들어왔다. 죽을 때가 되서야 자신의 욕심이 이리도 부끄럽다니. 이 책들이 할 일이 많은 이 아이에게 짐이 되진 않을까. 상투도 아직 못 튼 자신의 어리기만 한 아들이 이 책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 있을까.  


“백기야. 약속해다오. 서쾌는 책을 가진 자가 아니라 주는 자다. 책을 읽고 싶은 자에게 필요한 책을 주는 서쾌가 되어다오. 나는 네가 그런 서쾌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2.  


스윽 갓을 비켜드니 붉어지는 서쪽 하늘에 노랗게 떠오른 눈썹달이 눈에 들어왔다. 절로 감탄이 나올만한 유려한 자태였지만 백기에게 풍경을 감상할 만한 여유는 없었다. 잠시 느려진 발걸음을 재촉해 지루하게 이어지는 돌담을 걸어 벗어나자 저 끝에 애타게 기다리던 아담한 작은 기와집이 나타났다. 

그 이의 집이다. 대문에 다다른 백기는 따로 주인을 청하지도 않고 마치 주인인 양 대문을 열어 젖히고 성큼 안으로 들어선다. 

문을 지킬 변변찮은 하인도 부리지 못해 야심한 밤이 아닌 이상 늘 대문을 열어놓고 사는 가난한 양반가. 

일찍 홀로 된 안방마님이 계신 작은 안채, 원래 주인이었던 어른을 잃은 채 나이는 백기와 같지만 훨씬 앳되어 보이는 작은 도련님이 꿋꿋이 지키고 있는 작은 사랑채 하나가 전부인 작은 기와집이었다.  


그 사랑채 댓돌 위에는 지금 낯선 가죽 비단신들이 제각기 한 가득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저 창호지 너머로 두런두런 말소리들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오늘도 잔뜩 모였나 보군. 백기는 목소리를 작게 다듬었다. 


“도련님-” 듣지 못 한건가, 안에서 대답이 없다. 백기는 목소리를 조금 더 높였다. 

“도련님, 서쾌 백기가 왔습니다.”


그러자 곧 두런거리던 말소리가 그치고 하얀 얼굴 하나가 닫혀졌던 방문을 열고 나온다. 하얀 얼굴에 반가움이 물드는 것을 잠시 즐겁게 지켜본 다음 이내 풀어진 얼굴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그래, 이 사람. 이게 얼마만인가. 근 이 주 만이야. 잘 다녀왔는가?”

“제가 반가우십니까. 이렇게 매번 제가 올 때엔 도련님을 괴롭힐 일거리도 함께 오는데요  .”

“어찌 그걸 괴롭힐 일거리라 하는가. 나와 어머님의 생계를 유지해주는 고마운 일이지. 그래 이번에도 좋은 책들을 많이 가져온 게야?”


자신의 소맷자락을 답삭 잡아 올 기세로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는  도령의 앙증맞은 상투 끝부터 얼굴까지 쓰다듬듯 따뜻한 눈길로 살핀 백기는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네, 본격적인 일거리는 내일 정수를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이건 도련님이 부탁하셨던 책입니다.”

“아.. 매번 고마우이...”


수줍게 책을 건네받는 도령을 보며 그 책을 구하기 위해 수고한 며칠의 노고가 보상을 받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아, 지금 저 얼굴. 좋아하는 저 얼굴 하나를 보려고. 


“어찌 그런 책에까지 관심을 가지십니까. 한참 급제를 위해 문선 같은 책에 매진하실 고귀한 분께서 어찌 이런 언문소설에 기술서적까지 두루 관심을 가지시는 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어찌 그런 말을 내게 하는가. 자네야 말로 문선에서 이 이생규장전까지 안 읽은 서적이 없는 사람이.”

“저는 어디까지나 책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읽는 것이지 감히 책의 내용을 평하지는 않습니다.”

“겸손한 소리. 내가 원하는 책을 찾아다 줄 때마다 어울릴만한 책을 슬쩍 몇 권 같이 건네는 것을 내 모르지 않는데.” 


알고 있었군. 농을 던지듯 떠보는 도령의 말에 얼굴이 간지러워진 백기는 짓궂게 말을 붙였다. 


“그 책값은 어떻게 지불하실 건지요.”

“책값? 그래.. 그동안 그대가 내게 책을 빌려주면서도  그 삯을 받지 않아 나도 내심 불편했었지. 자네가 주는 일로 입에 풀칠도 하는데. 내가 이번은 꼭 값을 치름세. 얼마인가, 말해보게나.”




“부탁이 있네. 저 북촌 마을 끝에 작은 기와집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장가네 어린 도령이 하나 있지. 집안끼리도 친분이 있는 내 죽마고우인데. 명석한데도 어찌 아직 출세를 못했고 집안 사정은 어렵기 짝이 없다네. 그 아이 자존심이 강해 친우들이 많은데도 우리의 도움은 한사코 거절하고 있어. 자네라면 무슨 수가 있을 것 같아서 내 이리 부탁하네. 그 아이가 자존심이 다치지 않는 방법으로 그 곤궁한 삶에 도움을 줄 수 있겠나. 필요한 돈은 얼마든지 지급함세.”


 1여 년 전, 책을 거래하면서 친분을 튼 한석율의 사랑채에서 받았던 제안이 기억났다. 나는 책을 다루는 서쾌일 뿐 그런 심부름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거절하며 일어나는 자신을 석율은 급히 붙잡으며 그럼 우선 그 도령에게 책을 한 권만 주문 받고나서 판단하라고 했었다. 그래서 들린 그이의 집에서 처음 만난 도령은 제게 난데없이 양반집 도련님 네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언문소설 책을 주문했었다. 책을 구해다 주자 이미 한석율에게 대가를 받았다고 거절했음에도 끝끝내 모시 한 필을 자신에게 내밀었었다. 먼 친척이 보내온 선물인데 어머님 옷을 해드리고 남은 것이라 했다. 그를 닮아 곱고 깨끗한 옷감을 받아들면서 백기는 이 도련님이 꽤나 자신의 마음에 들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제안을 했다. 자신의 일을 도와주면 자신도 도령이 빈곤한 삶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처음에 그에게 부탁한 일은 필사였다. 아무래도 책을 구하다 보면 해지고 낡은 책들이 많아 필사 작업은 불가결했기 때문에 아마도 출세 공부를 오래해 온 도령에게 맞춤한 일 일듯 했다. 하지만.  




“말해보래두.”

“글귀를 받고 싶습니다. 이 책이요. 이 책을 읽고 제게 주고 싶은 구절을 써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자네, 또 나를 놀리는 건가.”



문제는 이 귀여운 도련님이 천하의 악필이라는데 있었다. 어쩐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얼굴이 사약을 앞에 둔 모습처럼 결연해보이더라니. 도령이 첫 필사본으로 내민 책을 보고 백기는 믿어지지가 않아 필사본과 도령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게 내 최선이네. 아무에게도 말 못했지만 내가 출세에 대한 꿈을 접은 것도 그 때문이야. 이런 글씨로는... 어떤 명문을 써도 그 생명을 잃게 될 터이니. 그러니, 내게 다른 일을 줄 수 없겠는가?”


그래서 백기는 그에게 필사 작업 대신 책을 분류하는 일을 맡겼다. 하루에도 몇 십권을 거래해오는 백기에게 그 또한 필요한 작업이었다. 명석하고 빠른 도령의 일처리 덕분에 백기의 머릿속에서도 책 목록은 늘 정돈된 채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종류의 부탁은 충분히 농으로 들릴 만 했다. 그래도 받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다. 마음을 받고 싶은 것을 이렇게 밖에 표현 하지 못할 뿐이었다. 


“맞습니다. 농입니다. 아직 모시 한 필의 값이 안 찼습니다.  이번 여름이 매우 더워 성 안의 모시가 동나는 바람에 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은 아십니까? 아직 내다팔지 않았으니 당분간 책 빌리는 값은 충당하실 수 있습니다. 친우들 기다리시는 데 들어가 보시지요. 다음에 또 들리겠습니다.”


백기는 잠시 자기가 건넨 책을 잡고 있는 하얀 손에 눈길을 던진 후 공손히 물러났다. 도령은 뒤돌아선 자신을 보고 있을까. 머뭇거리다가는 뒤돌아보고 싶어질 것 같아 백기는 발걸음을 재촉해서 그 자리를 떠났다. 








3. 


북병남주라 했던가. 예부터 북촌은 떡을, 남촌은 술을 잘 빚는다했지. 남산아래 역참에 책을 팔러 나갔다가 마침 질 좋은 탁주를 값으로 받았다. 자신은 술을 한 잔도 못했다. 대신 술을 좋아하는 이는 하나 알고 있었다. 먹지도 못하는 술을 책값으로 흔쾌히 받았던 것은 그 이유였다. 밤이 늦긴 했지만 술을 받고 즐거워할 얼굴을 상상하며 북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와아.. 마침 날이 더워 술 한 잔 꺾고 싶었던 걸 어찌 알고.”

“저보다 이 술이 반가우신가봅니다. 주인마님께서는 이미 잠드셨겠지요?”

“그렇지. 이리 마루로 앉으시게. 내 간단히 상을 내옴세.”

“아니, 제가 하겠습니다.”

“손에게 맡길 수야 없지. 예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래두.”  


어쩐지 신나 보이는 그 모습을 보며 더없이 흐뭇해진 백기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머리에 쓴 갓을 풀어 내려놓으면서 보니 마루에는 일전에 자신이 도령에게 건넨 책이 흩어져 있었다. 환한 달빛을 삼아 책을 읽고 있었던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잠에 들어야 하는 자신과 달리 늦은 밤에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도령이 신기했다. 하긴 이 도령이 하는 일에는 신기한 일이 참 많았는데. 


“자, 자네는 술을 못 하니 이만큼만 받게. 받고 넘기지 않으면 아까워서 어쩔 거야. 나머진 다 내가 꺾음세.”


어울리지 않는 저 엄청난 주량도 크게 한몫했다. 별다른 안주도 없이 술 자체의 맛을 즐기는 이였다. 같은 걸 느껴보고 싶어 급하게 입안에 털어 넣은 탁주가 못내 써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저를 도령은 짐짓 웃으며 바라보았다. 


“무리하지 마시게. 뭐 좋은 거라고.”


일 순배, 이 순배. 술은 거의 도령이 마시고 자신은 아주 조금만 입을 축이는 정도였지만 그것도 술이라고 마음이 하늘하늘 풀어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알듯 모를 듯 미소를 띠고 정자세로 마주 앉아 있는 도령이 자신의 눈에 더없이 순해 보이기도 하고 또 위험해보이기도 했다. 


“오늘밤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도련님.”

“내가?”

“네. 도련님을 본지도 이제 1년이 다되어갑니다. 제가 잘못 짚은 것입니까.”

“역시.. 자네 눈은 못 속이겠구만.”


도령은 자신의 빈 잔에 스스로 탁주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말이야. 벗들과 하는 독서 모임에서 한 문인 모임의 작문을 읽었다네. 그 중에 하나의 글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지 뭔가. 그 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석율이 그 글을 쓴 선비가 바로 강해준 선비라고 알려주었지. 강해준. 어떤 사람일까. 글에서 뿜어 나오는 기백으로 봤을 때 아주 강직한 사람일 게 틀림이 없어. 그리고 그 인용한 문구들을 봤을 때 지식의 깊이도 매우 깊을 터. 한번만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강해준 선비가 속해있는 그 문인 사모임은 감히 나 같은 입신도 못할 풋내기 선비가 낄 자리가 아니야. 이미 성취도 배움도 지식도 어마어마한 그 모임의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감히 말을 섞지도 못할 위치이지.”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도련님답지 않으십니다.”

“그런가?.. 암튼 내가 그리 낙담하고 있자 석율이 강선비님과 같은 삼사에서 일하시는 춘부장 어른께 청을 넣어 일간 우리 모임에 한번 들러 주십사 부탁을 한다지 뭔가. 내 그 답을 기다리는데 아직 답이 오지 않았음에도 이리 기분이 좋은가보네.” 

“... 그러십니까.”


“자네는 강선비님을  만나본 적이 없나? 그대는 남촌, 북촌.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부터 명문세도가까지 책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책을 가진 사람들을 살피지 않나?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도저히 궁금해서 잠도 안 올 것 같아.”


모를 리가. 강해준이라면 여러 해전 장원급제하여 유생을 거쳐 삼사에 발탁되는 바람에 도성을 떠들썩하게 만든 인재였다. 유려한 글 솜씨로 조금씩 문인계에도 그 이름을 알리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이름난 건 글처럼 단정한 성품과 지나치게 빼어난 외모였다. 입안을 맴돌고 있던 술 내음이 더 쓰게 느껴져 백기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벌써 가려구?”

“그렇게 흠모하시면 서찰이라도 써주시던가요. 제가 전해드리겠습니다.” 


툭 말을 뱉어놓고도, 막상 도령이 그러겠다 나설까봐 백기는 서둘러 내려놓았던 갓을 고쳐 썼다. 도령은 묵묵히 그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리 보십니까. 정말 연서라도 써 내어 주실 요량이십니까? 저한테는 책 한 글귀마저 아까워 써주시지 않는 분께서 말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나가는 말이 놀라웠다. 깊이 생각지 않고 내뱉은 말은 이미 어지러져 있던 자신의 마음을 거칠게 헤집고 지나갔다. 말이 없는 도령의 눈빛을 마주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대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 나왔다. 얼마 마시지도 않은 술기운이 백기를 훅 덮쳐왔다. 모든 게 엉망인 밤이었다.


             





4. 


“서방님, 서쾌가 왔습니다. 서방님이 찾고 계시던 책을 가져왔다 합니다.”

“들여보내게.”


백기는 안내받은 사랑채에 들어서자 슬쩍 방 분위기를 살폈다. 제 주인을 닮아 단정하고 고고한 분위기가 새어나왔다. 마주한 얼굴은 소문이 무색할 만큼의 미남자였다. 대뜸 당돌하게 눈을 맞춰오는 서쾌의 분위기가 심상찮았던지 해준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래, 내가 찾던 책을 가져왔다고.”

“네. 백탑청연집 이옵니다.”

“그게 정말인가?! 내 그 책을 오래 수소문하고 다녔는데. 이런 고마울 때가. 그래, 이 책을 대체 어디에서 구했는가?”


“책은 모으기는 힘들지만 흩어지는 건 순식간입니다. 운 좋게 제가 책이 흩어지던 그 순간에 함께 있었을 뿐이지요.” 


묘한 대답이었다. 서쾌라는, 저 생각보다 어려보이는 사내는 이 방을 들어선 후로 해준의 눈을 절대 피하지 않고 있었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보군. 저 이는 제가 원하는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선 그 값을 맞춰줘야 하는 건 해준이었다. 해준은 신분의 차이가 있음에도 자신 앞에서 굳이 제 기를 숨기지 않는 저 서쾌에게 흥미가 생겼다. 


“자네, 이름이 뭔가.”

“장가, 백기라고 하옵니다.”

“서쾌라 했지. 서쾌는 책이 많을 게야. 내 소장하고 있는 서적들과 비교해보고 싶군.”

“서쾌는 책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저는 다만, 누가 무슨 책을 언제부터 가졌는지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책의 내용이 어떤 내용이고 누가 언제 썼는지도 알고 있지요. 그러니 세상 모든 책이 바로 제 책입니다. 책은 소유하고 있는 자의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자의 것이라는 게 제 소견입니다.” 


“대단하군... 그래. 마치 책의 주인을 서쾌인 자네가 결정한다는 걸로 들리는 게 내 착각은 아니지 싶어. 그럼, 이 내가 그 책의 주인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가. 말해보게.”


과연. 자신의 작은 도련님은 어쩜 사람 보는 눈도 이리 정확한지. 어쩐지 즐겁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해준의 눈빛을 받아내며 보이지 않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백탑청연집.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 당대 개성과 감수성을 엿 볼 수 있는 풍류 넘치던 선비들의 시문과 척독을 모아 편집한 책으로 박제가가 그 제목을 붙였다. 당돌한 서쾌와의 대화에도 저리 여유를 잃지 않는 선비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책이었다. 백기는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이런 종류의 사람을 좋아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해준의 서안에 품고 왔던 책을 내려놓고 물러섰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입니다. 며칠 전 삼사의 한 대감님으로부터 작은 문인 모임에 참석해 달라 청을 받으신 걸로 압니다.”

“맞네. 한 대감님의 장자가 속해있는 문인 모임인데. 나를 흠모하는 어린 선비님들이 많으니 한번 참석해주십사 원하는 청을 받았지. 그걸 자네가 어찌 아는가.”


“거절하십시오.”

“귀한 분의 청을 거절해달라. 내가 왜 그래야 하는가?”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라면 제가 그만한 책을 들고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훨씬 더 가벼운 책을 들고 왔겠지요. 호기심은 그 책값으로 받은 걸로 하시지요.”


“허허허.. 그 사람 참. 알았네. 내 그리 함세. 대신 자네, 내게 종종 들러주겠나. 나는 오늘 대화가 매우 흥미로웠네. 장서쾌.”

“일간 또 들리겠습니다. 저 서쾌 백기, 오늘 나리께 저지른 이 무례를 앞으로의 신용 있는 거래로 상쇄토록 노력하겠습니다.”








5. 


“서쾌 어른. 정녕 북촌에는 안 들리실 겁니까? 도련님이 기다리시는 눈치셨습니다.” 

“정수야, 이번 청국에서 꼭 구해야 하는 서적 목록은 정리해 놓았느냐. 내 오늘까지 부탁하지 않았던.”

“어르신. 말 돌리지 마시구요. 중간에서 아주 제가 죽겠습니다.”

“한 달이다. 긴 시간이지. 한 달동안 먹을 거며 입을 것이며 내 대신 도련님을 잘 돌봐드리거라. 끼니를 종종 거르시는 걸 알지 않느냐. 참, 술도 떨어지지 않게 가끔 넣어드리고. 청에서 진귀한 술을 구해 가져오겠노라 전해 드리거라. 좋아하실 게야.”

“아니, 직접 가서 말씀 하시라구요.”


백기는 쓰게 웃으며 마저 봇짐을 쌌다. 술을 나눈 밤 이후로 그 얼굴을 다시 보러 갈 자신이 없었다. 자신도 스스로 정의 내리거나 정리할 새도 없이 얼척없게 들키고 만 어설픈 마음이 아팠다. 또한 앞으로 한 달이나 그 부드러운 손끝이나 다정한 눈매를 볼 수 없다는 것도 서글펐다. 이대로 보지 않고 가는 게 나을 것만 같았다. 한 달 동안 떨어져 생각을 정리해보면 이 마음도 어느 정도 가라앉아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단단히 봇짐을 단속하고 말안장에 올라탔다. 묵묵히 말고삐를 쥐고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렀다. 결심한 듯 고삐를 당겼을 때 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보게, 장서쾌!!”

분명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으나 고삐를 당기던 손을 멈추지 못해 그대로 앞으로 말이 발을 구르던 순간 작은 인영이 말 앞을 막아섰다. 


“장백기!!!!!”

백기는 크게 놀라 얼른 고삐를 옆으로 당겨 말머리를 돌렸다. 하마터면 앞의 사람을 칠 뻔했다. 놀란 숨을 내쉬며 백기는 저만치 앞에서 팔을 벌린 채로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장도령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큰일 날 뻔 했지 않습니까? 어찌 그리 무모하십니까?”

“나는... 그대가 먼 길을 떠난다기에.. 가기 전에 이걸 주려고...”

가뜩이나 놀랐는데 백기의 고함 때문에 더 놀랜 기색이 역력한 도령은 말을 탄 백기에게 쭈뼛쭈뼛 다가와 소매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백기에게 건넸다. 


“이게 대체 무엇입니까.”

“글귀일세. 그대가 원한 이생규장전의 글귀. 이거 써주지 않는다고 그대가 내게 삐졌잖은가.”

“... 제가 언제 삐졌다고 그러십니까.”

“난 진짜 부끄러워서 쓰기 싫은데. 자꾸 이런 거나 써달라고 하고. 안 써주니까 오지도 않고.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기다리셨습니까. 저를요.”

“... ...” 


도령은 가만히 얼굴을 붉히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백기는 말안장 위에서 빨개진 그이의 얼굴을 맘껏 감상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보러 와준 것이 신기하고 고맙기만 했다. 그렇게 그간 못 본 것 까지 다 계속해서 그 얼굴만 들여다 보고 싶었다. 


“이거 안 받을 텐가. 손이 부끄러우이.”

“원하면, 나중에 연서도 써 주실 겁니까?’

“...!!”

“농입니다. 청에서 도련님이 읽으실 만한 책을 골라보겠습니다. 맛있는 술도 물어 챙겨오지요.”

“다 필요 없네. 건강히 다녀오기만 하게. 그리고 ... ...................”

“뭐라 하셨습니까,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기다릴 거야. 하루빨리 그대가 곁으로 돌아오길 기다릴 거라고 그리 말했어.”


단단하게 제 말을 전하는 도령이 기특했다. 저 말을 내 뱉기 까지 저 눈치 없고 느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말이 고개를 흔들며 자꾸 그만 길을 나서길 재촉했지만 백기는 저만을 담고 있는 저 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백기는 도령의 손에서 서찰을 받아 품속에 간직했다. 평생 이렇게 마음이 뿌듯이 차올랐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괜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떠나는 길에 두고 가는 소중한 이에게 걱정을 남길 수 없어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서쾌 백기,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그 동안 꼭 건강 조심하셔야 합니다, 도련님"

“응. 다녀오게.”


이랴, 오래 기다렸던 듯 말은 경쾌하게 발을 굴렀다. 두근두근. 문득 백기는 말을 멈춰 세워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멀리 아직 도령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먼저 뒤돌아서는 나를 그대가 저리 오래 지켜보고 서 있었던 때가. 그를 향해 작게 고개를 숙여 목례하고 다시 돌아 말을 달렸다. 그래, 한 달이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꼭 당신이 당부한대로, 건강한 모습으로 당신 곁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you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Happy birthday to my HJ  (1) 2016.10.08
퀘스트  (2) 2016.07.12
기승전결  (4) 2015.12.27
구매 내역서  (100) 2015.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