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27.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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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섹스하고 싶다!" 


한숨처럼 뱉어낸 소리가 작은 자취방을 울렸다. 내 인생이 이렇게 불쌍한데 중간고사가 무슨 소용이야.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엎어졌다. 두꺼운 전공책이 서늘하게 볼에 닿았다. 오리처럼 입술을 툭 내밀고 한참을 눈만 껌벅껌벅하고 있으니 생각이 좀 정리되는 듯 했다. 결론은 역시. 섹스를 해야겠어. 


[장백기] 형 나 좀 살려줘 


엎드린 채 한손으로 빠르게 메시지를 보내자 곧 답장이 왔다. 


[강해준] 너 또 아다 얘기냐 


반응이 오니 바로 앉아 두 손으로 폰을 쥐고 얼른 죽는 소리를 했다. 


[장백기] 형 나 이러다 마법사 되는 거 아니야? 

[강해준] 스물하나에 그런 고민은 좀 이른 듯. 근데 가능성이 없진 않지 

[장백기] 아 형!!!!!!!!! 

[강해준] 너 운명 어쩌고 하는 생각 안 버리면 영원히 아다 못 뗀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해 



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해준형은 고등학교 1년 선배였다. 입학하고 학생회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기 전부터 나는 형을 알았다. 형은 전교회장이었고 잘생겼고 게이였으니까. 나는 14살에 성정체성을 깨달았지만 천성이 소극적이라 그런지 그렇구나, 할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자식은 못 갖겠구나, 정도가 그때 내가 한 고민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고요한 나를 크게 출렁이게 한 건 한석율이었다. 중2 여름이었나. 쉬는 시간에 우리반으로 찾아온 한석율은 만화책을 보고 있던 내 귀에 대고 대뜸 이렇게 속삭였다. 


"너 게이지?" 


놀란 내가 바보같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내 어깨에 턱을 부딪힐 뻔한 그는 두 팔을 벌려 들며 나보다 더 깜짝 놀란 듯한 액션을 취하더니 나도야, 하며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그때 나는 한석율이 우리 학교 애인지도 몰랐을 만큼 우리는 남이었기 때문에 황당하고 어이없음이 두 배였다. 그런 그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야, 하며 웃는 그에게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아니 외면하고 있었지만 내 속 깊은 곳에서 '나만 이상한 건가'라는 고민이 어린 나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나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그럴듯한 인사도 없이 어느새 친해져있었다. 한석율의 집에서 아일랜드산 동영상을 보다가 문득 그에게 내가 게이인 거 어떻게 알았냐고 물은 건 보름 정도 지나서였다. 그가 자기 정수리 위에 게이더 안 보이냐는 헛소리를 하길래 더 묻고 싶은 생각을 접고 동영상에 집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믿게 됐다. 보이지 않는 한석율의 게이더를. 



학원 앞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뜯고 있을 때 한석율이 내 어깨를 툭 치고 턱짓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언뜻 스쳐봐도 잘생김이 묻은 놈이 편의점 앞을 지나 학원으로 들어갔고 한석율이 내 쪽으로 몸을 붙이며 작게 말했다. 


"쟤 게이." 

"뭐. 또 그 게이더?" 

"적중률 일백프로." 

"지랄." 


근데 다음날 학원 화장실에서 걔가 통통한 남자애랑 키스하는 걸 내 눈으로 목격했다. 수업중이라 복도는 조용했고 화장실엔 둘뿐이었다. 둘의 키스는 나이답지 않게 꽤 끈적했고 나는 조용히 발소리를 낮춰 몰래 빠져나왔다. 오오 한석율. 오오 게이더 인정. 그날 집에 가는 길에 한석율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걔 이름은 강해준이고 우리보다 한살 많다는 정보를 술술 읊었다. 그렇게 알게 된 해준형을 고등학교에서 다시 보게 된 거다. 



축제준비로 학생회 임원들이 늦게까지 바쁘던 어느 밤 불 꺼진 복도 저 끝에서 해준형은 통화 중이었다. 멀리서도 해준형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는 게 보였다. 이내 전화를 끊고 어둠 속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형의 얼굴은 내가 선 쪽만 켜둔 형광등 빛을 받아서인지 더없이 환하고 멋졌다. 


"형 누구랑 통화했길래 그렇게 표정이 좋아요?"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괜히 물었다. 다 알면서. 


"남자친구." 


헐. 형이 실수한 건가 싶어 못 들은 척을 하려고 얼른 몸을 돌렸다. 


"너 다 알잖아. 너 한석율이랑 친구지?" 


내가 천천히 몸을 돌리자 형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걔 유명한 끼순이(*여성스러운 게이)잖아. 걔가 나 좋아하는 것도 알아." 


그렇다. 한석율은 걸커(*걸어다니는 커밍아웃)였다. 그리고 또한 그렇다. 그즈음 한석율은 해준형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건 대수롭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중2때 한석율은 1학년 헤테로(*이성애자) 후배를 좋아했고 중3때는 나를 좋아했었으니까. 한석율은 나랑 다른 고등학교에 가게 됐지만 그는 늘 야자를 째고 우리 학교 앞을 어슬렁거렸다. 내가 아닌 해준형을 보려고. 


"한석율한테 밤에 문자 좀 보내지 말라고 해. 1004로 보내도 걘 거 다 안다고. 그리고 언니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 나 그거 딱 질색이니까. 그리고." 


내가 한석율도 아닌데 듣고 있는 내 볼이 화끈거렸다. 아 한석율. 그러게 작작 좀 하지. 


"너 고민 있으면 나한테 말해. 해결은 못해줘도 들어는 줄게." 


그래서 내가 형한테 이렇게 죽는 소리를 하는 거다. 들어준다며? 



[장백기] 사랑하는 사람이랑 아다 떼면 안 돼? 운명적인 사랑! 운명적인 섹스! 형은 내 맘도 몰라주구 힝 

[강해준] ㄲㅈ 

[장백기] ㅈㅅ 

[강해준] 이따 이태원 잠깐 와라 동식이랑 있어 

[장백기] 데이트 방해하기 싫은데 

[강해준] 7년 만났으면 가족이지 데이트는 무슨. 전화해라 


말은 이렇게 해도 동식형 앞에선 아직도 꿀 떨어지는 해준형이다. 축제 준비하던 학교 복도 끝에서부터 여기 이태원 펄스 앞까지. 꿀이 뚝뚝. 


"얘는 또 왜 달고 나왔냐?" 

"형. 내가 달고 나온 게 아니..." 

"강해준 또 그런다. 난 우리 석율이 좋아." 

"언니 역시 언니가 최고야." 

"우리석율이? 야 김동식. 얘가 나 고등학교 때 좋아했었다니까?" 

"그때 너 나랑 사귀고 있었고 한 번도 눈 안 돌렸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게. 그리고 지금은 아니잖아. 그치 석율?" 


한석율은 이태원에서 살다시피 하는 놈이라 정말 내가 달고 나온 게 아니었고, 언니 소리 질색하는 해준형 앞에서 한석율은 일부러 더 동식형에게 언니, 언니하며 앵겼다. 동식형은 그런 한석율을 귀여워했고, 나는 늘 해준형에 대한 동식형의 견고한 믿음을 부러워했다. 클럽에서 흔들 기분 아니라는 나 때문에 우리는 조용한 술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손님이 찬 몇 테이블은 다 남자였고 들어서자마자 스캔을 마친 한석율은 다 게이라고 했다. 그중 하나는 2주 전에 잤던 놈이라고. 올(*탑/바텀 모두 가능)이래서 만났는데 마짜(*바텀)더라며 텔비만 날렸다고 눈을 흘기고 쫑알쫑알 툴툴거렸다. 


"한석율. 좀 닥쳐줄래? 너는 모르고 왔겠지만 이 자리는 장백기 동정탈출기원 모임이거든?" 



이내 술이 약한 나만 눈이 풀렸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나는 테이블에 잔을 쾅쾅 부딪치며 왜 이 많은 남자 중에 내 운명은 없냐고 섹스하고 싶다고 소리를 질렀다. 동식형은 테이블 위에 한쪽 팔로 턱을 괴고 안쓰러운 눈길을 내게 보냈고, 해준형은 완전히 동식형쪽으로 몸을 돌리고 한손은 동식형의 귀를 만지며 다른 손은 동식형의 손을 자기 허벅지에 얹어놓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쟤 또 운명타령 시작한다." 


어휴, 하며 해준형이 몸을 동식형쪽으로 더 돌려 앉았다. 


"백기야. 니 마음도 충분히 잘 알겠는데 이건 나도 강해준이랑 같은 생각이야." 

"혀엉. 형까지 이러기야? 내가 뭐 왕자님에 백마 한필까지 바래? 운명같..." 

"아 그놈의 운명! 지겹다 지겨워. 후장개통 하고 싶다며 새끼야." 


해준형은 못 참겠다는 듯 담배를 쥐고 일어났다. 나는 재수해서 간신히 들어간 대학을 하이패스로 들어간 사람 입이 저렇다. 눈을 치켜뜨고 해준형을 노려봤다. 의자에서 다리를 빼 돌아나가는 해준형의 엉덩이를 동식형이 쳐다보지도 않고 익숙하게 손등으로 툭툭 두들겼다. 시무룩해진 나를 향해 동식형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백기야. 운명의 상대를 비 오는 날 거리에서 우산도 없이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나는 거? 좋겠지. 근데 우린 인구의 절반 중에 찾는 거 아니잖아. 절반의 절반의 절반 절반 정도 되려나? 그중에서도 벽장(*closet gays) 일틱(*일반틱)은 못 알아본다고 치면... 아다 떼고 싶으면 운명은 넣어둬. 일단 만나서 운명으로 만들면 되지 뭐."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는 동식형의 목소리에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마침 문을 열고 담배냄새를 털어내려는 듯 손으로 셔츠 여기저기를 쓸어내리며 해준형이 들어왔다. 바깥의 청량한 공기와 희미한 담배냄새를 안고 들어온 해준형이 동식형의 뒤에서 고개를 숙여 볼에 입을 맞추고 자리에 앉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울컥 슬퍼졌다. 니들은 운명처럼 사랑하면서 섹스도 하잖아! 취기에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넣으려고 나는 화살을 옆에 앉은 한석율에게 돌렸다. 


"넌 아까부터 뭐 하냐?" 

"어... 얘 어때?" 


한석율이 폰을 내 쪽으로 내밀었고 화면엔 잭디(*게이채팅어플)가 떠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잭디에 누군가 올린 프로필 사진이었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반신 누드였다. 


"너무 근육이지? 나는 해준형정도가 딱 좋은데." 

"우리 석율이 어떡하냐. 강해준 원래 너처럼 스탠(*standard-체격)이 식(*취향)인데 나 만나고 베어(*bear-체격)로 바뀌어서." 


동식형의 말에 해준형은 양손을 뻗어 동식형의 배와 등을 만졌다. 한석율은 입을 한 번 삐죽이고는 폰을 다시 제 앞으로 가져가 이리저리 엄지를 놀리며 말했다. 


"너 이런 어플로 만나는 거 싫다고 하지만 니가 아다 뗄 수 있는 길을 이거밖에 없다." 


술집에 들어와서 한 마디도 않고 손가락만 놀리더니 한석율은 그 말만 남기고 곧 번개에 성공해 가버렸다. 해준형은 연신 동식형의 곱슬한 머리카락이며 볼이며 손을 쓰다듬었고 결국 동식형이 내게 사과를 해왔다. 


"백기야 일어나자. 미안. 강해준 자꾸 이래서 안 되겠다." 


자러간다는 뜻이다. 더러운 세상. 니들끼리 섹스 다 해먹어라. 모두 보내고 혼자 택시에 올랐다. 습관처럼 오리입을 툭 내밀고 창밖으로 주황색 선을 길게 그리는 가로등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난 정말 대학만 가면 운명의 상대가 나타날 줄 알고 커뮤 활동도 안 하고 어플도 안 깔았는데.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려고 아껴온 동정이 아깝다. 근데 하긴 사람일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긴 하지. 당장 이 길로 내가 죽기라도 하면 나는 섹스도 못해보고 죽은 진짜 퓨어총각귀신 되는 거 아냐. 근데 더 큰 문제는 이대로 만수무강 한다고 해도 정말 영영 운명의 상대가 안 나타나면 나는 여든까지 딸만 치다 가는 건가. 한숨이 절로 났다. 잭디를 다운받았다. 그래 일단 가입이라도 해보자.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프로필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아웃팅 당할 수도 있으니까 이름은, 음... 뭘로 하지. 창밖을 내다보며 보이는 것들을 명명해봤다. 가로등 한강 다리 밤 달 별 하늘. 하늘 좋네. 하늘은 너무 하늘하늘하니까 영어로 쓰자. 스카이. 자 다음. 사진은 어쩌지. 사진첩에서 1년 전 찍은 사진까지 뒤적여 봐도 아웃팅 걱정하지 않고 나를 어필할만한 사진은 없었다. 한 장 찍어야겠네. 셀카 모드로 폰을 쥐고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거나 카메라를 내려 턱만 나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찍어봤지만 마음에 안 들었다. 결국 창밖으로 한강을 향해 한손을 내밀고 그걸 찍었다. 다음은 자기소개. 이게 사진보다 더 쑥스럽네. 아다 떼주실 분 급구, 라고 썼다가 미친놈아 그게 자랑이다 생각하며 얼른 지웠다. 한참을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앉아 있다가 택시가 자취방 앞에 다다라서야 얼른 한 줄을 입력했다. 

'손잡고싶다' 



"Jack'd message! Jack'd message!" 


알람 소리에 눈을 떠보니 해는 중천을 넘어 이미 질 무렵이었다. 누운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자 으어어, 소리가 절로 났다. 음 잭디메시지? 아 잭디메시지! 얼른 폰을 주워 확인했다. 뭐지 이거... 연예인 사진인가? 의심스러운 프로필 사진부터 보고 창을 열었다. 


[예스] 6시 합정 어떠세요? 

[스카이] 네? 지금 바로요? 

[예스] 전 그쪽 프로필 다 마음에 들어요. 제 프로필 안 보셨어요? 


원래 이렇게 하는 건가. 나 재수하는 동안 한석율이 개처럼 번개하고 다닐 때 어깨너머 좀 배워둘걸.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한석율에게 전화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이 사람 메시지를 읽씹할 순 없었다. 그래 장백기. 섹스만 생각하자. 섹스. 섹스. 


[스카이] 6시 합정. 좋아요 



"그... 저.." 

"네. 말씀하세요." 

"그게.. 저는 그게 연예인 사진인 줄 알았는데. 진짜셨네요..." 


미친 듯한 속도로, 그렇지만 그 와중에 첫 섹스라는 거사를 앞둔 터라 더 깨끗이 샤워를 하고 달려 나와 정신을 차려보니 프로필 사진 속에 연예인 뺨 후려치던 남자가 눈앞에 앉아있었다. 


"그쪽 프로필도 본인 손 아니에요?" 


내 헛소리도 이렇게 따뜻하게 받아줬다. 빛나는 그 얼굴로. 첫 만남의 뻘쭘함도 잊고 나는 넋 놓고 그 얼굴을 감상했다. 입술이 뭐 저래. 화장한 건가. 저 봐 피부도. 했네 했어 화장. 근데 이쁘다. 화장해서 이쁜 건가. 한석율은 화장하고 다녀도 저렇게 이쁘진 않던데. 


"저녁은 먹었어요?" 


입술이 벙긋벙긋 움직이더니 입술보다 빨간 혀가 나와 입술을 스윽, 핥고 들어간다. 어? 화장한 거 아니네. 와. 연예인하지 왜 여기 나와서 나한테 시간을 버리고 있지. 저런 입술은 무슨 맛일까. 여기 투썸은 이태리제 조명을 쓰나보네. 왜 피부에서 빛이 나지. 저 목 한 번만 빨아봤으면 좋겠다. 


“영화나 볼까요? 요즘 영화 뭐 하더라...“ 


입술이 또 움직이네. 영... 화.. 네.. 영화... 존나 빨갛다. 아까보다 더 빨개. 네? 영화? 영화가 왜요? 아 보러가자고요? 왜요? 나 섹스 하러 나왔는데요? 어차피 섹스 하러 나왔는데 영화 꼭 봐야 돼요? 그냥 바로 가면 안 돼요? 


“저기요... 저기요?” 

“모텔가요! 우리...” 


한석율이 번개에서 만난 또라이들 얘기하면서 싸이코패스네 쏘시오패스네 열을 낼 때는 설마 진짜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한석율 저게 괜히 과장스레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 있었다. 그 또라이가. 내 느낌으로는 우리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힌 채 적게 잡아도 120초는 흐른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발 장백기 넌 그냥 평생 혼자 딸이나 쳐라 이 미친놈아.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빨리 가주세요. 존나 쪽팔리니까. 


“안 가요?” 


예. 전 안 가요. 전 못 갑니다. 전 그냥 여기서 하얗게 불타버리고 싶... 예? 고개를 들자 그가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홀린 듯이 일어나 얼레벌레 그를 따라 걷다보니 모텔이었다. 키를 받아 올라가며 내 또라이 짓을 해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입이 뇌랑 상의도 없이 혼자 나불대기 시작했다. 제가 실은 동정인데요 아직 제가 탑인지 바텀인지도 몰라요 잭디도 어제 처음 써봤거든요 근데 막상 나와 보니 그쪽이 너무 어 뭐랄까 얼굴이 그러니까 아무튼 좋아서 제가 정신줄을 놓치고 횡설수설 했는데 그게 그러니까 음 제가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 같은데 맞나요? 기억은 없지만 뭐 이런 식으로 나불댄 것 같다. 침대에 걸터앉아 다음 단계를 생각했다. 센조이(*관장) 하라고 말해도 되나. 싫다고 하면 어쩌지. 콘돔 쓴다고 해도 첫 섹스는 깨끗하게 하고 싶은데. 그냥 내가 하고 나와야 하나. 오늘 둘 다 해봐야 내가 탑인지 바텀인지 알 텐데. 생각하고 있는데 이미 그는 눈앞에서 팬티 한 장 남기고 옷을 다 벗었다. 


“어... 제가.. 좀 씻고 올까요?” 


부끄럽고 떨리고 당황스럽고 사실은 좋아서 일단은 화장실로 피하고 싶었는데 내 말에는 대꾸도 없이 그가 팬티마저 벗어버렸다. 홀랑. 그 때 불현듯 한석율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너는 뭔데?" 

"마짜." 

"그게 딱 느껴져?" 

"어. 딱 박히는 순간 아ㅡ 나는 천상 박히기 위해 태어났구나 싶어." 

"그래도 아프지?" 

"존나 아프지. 피 날뻔한 적도 있어." 


나는 미간을 구기며 입꼬리를 내렸다. 어쨌든 둘 다 해봐야 알 수 있겠구나. 그리고 나는 천상 탑이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생각했다. 


"너 지금 너는 때짜(*탑)였으면 하고 바라고 있지?" 


한석율. 이 귀신. 


"어. 근데 전립선 건드리려면 좀 커야겠지?" 

"글쎄. 그렇게 안 커도 충분히 닿지 않나? 한... 이 정도?" 


한석율이 폰에 저장된 누드 사진 하나를 열어 보여줬다. 그다지 크지 않다는 사진 속 물건을 보는 순간 나는 좀 초라해져서 너는 대체 이런 사진을 왜 저장하고 다니는 걸까 라는 생각이 쏙 들어갔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사진 속 그 모델보다 큰 물건이 말갛게 웃으며 침대로 다가와 내 어깨를 짚어 나를 눕히고 있다. 나는 생각했다. 해준형 말대로. 


"긴장 풀어요." 


오늘이 개통기념일이구나.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나는 애널섹스 별로예요."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 눈빛이 너무 따뜻해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더 좋게 해줄게요." 


아마 그 때부터였지 싶다. 대실 4시간을 다 쓰고 연장까지 하게 된 발기의 시작이. 시발 섹스. 


좋아. 섹스 존나 좋아. 이런 걸 대체 누가 만든 거야. 그리고 나는 신을 믿게 됐다. 엄마가 주말 아침 교회에 끌고 가려고 등짝스매싱을 날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엄마가 믿는 그 신이 진짜 있다면 엄마 아들을 게이로 태어나게 하진 않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신은 진짜 존재했던 것이다. 신이 입을 손을 허벅지를 엉덩이를 만든 건 섹스 하라고 만든 게 분명해. 신은 어쩜 이런 걸 만들어놓고 나한테 그동안 말도 안 해주고. 아니다. 원망하지 않을게요. 앞으로 열심히 쓰고 살겠습니다. 나는 연신 감사와 감동을 전하며 평생 에널섹스 안 하고 이렇게 살아도 충분히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혼이 나간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더니 끝까지 다정한 미소로 먼저 방을 나갔다. 에프터에 대한 어떤 뉘앙스도 없이. 번호도 이름도 모른 채. 다시 만날 수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런 식의 번개에 어떤 룰이 있는지 몰라서 차마 붙잡지 못했다. 









그리고 보름이 지났다. 

예스님은 그렇게 증발하듯 사라졌다. 잭디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감동적인 첫 섹스를 하고 나흘쯤 지났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잭디 프로필에 손 사진 따위를 올려서는 그 누구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다는 걸. 이것은 마치 카톡 프로필에 철쭉 사진만 올리는 고모한테 말 걸기 꺼려지는 것과 비슷했다. 그럼에도 그런 사진을 보고 나에게 말을 걸어준 예스님. 내 또라이짓도 다정하게 받아준 예스님. 그 얼굴로 나랑 섹스해준 예스님. 그는 천사일까. 헐. 이름도 예수님이랑 비슷해! 지져스. 엄마. 엄마의 기도빨로 드디어 아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어요. 예스님을 찾지 못해 이렇게 미쳐가고 있을 즈음 중간고사가 시작되었다. 공부를 못 해 시험지를 받아들었을 때 답을 써내려갈 수 있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지만 중간고사 기간 내내 컨디션은 상쾌했다. 이게 바로 위대한 섹스의 힘이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 앞으로 존나 할 거야. 섹스.


잭디 프로필을 바꾸는 게 우선인데 아무래도 아직은 아웃팅이 겁났다. 내가 뭐 어디서 빠지는 몸은 아니지만 몸사진을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 사진첩을 들여다보다 문득 재작년부터 닮았다는 소리를 부쩍 듣는 배우 강하늘이 생각났다. 나 원 참.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지? 구글에서 강하늘을 검색해 최대한 연예인 티 안 나는 사진 3장을 골라 프로필을 꽉꽉 채워넣었다.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왜냐면 한석율의 잭디 프로필은 송중기였으니까.


곧 몇 번의 번개를 했다. 예스님을 만날 때처럼 엄청 떨릴 것 같았는데 한 번 해봐서 그런지 처음처럼 떨리지는 않았다. 아는만큼 편해졌나보다.


예스님이 그날 나에게 섹스의 감동 외에도 많은 걸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콘돔은 꼭 사용하라든지, 손톱은 항상 짧고 깨끗하게 관리하라는 등 기본적인 것들 외에도 바텀은 허리 밑에 쿠션을 깔아야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든지, 탑은 상대방을 배려해 천천히 넣는 게 삽입 전 손가락으로 풀어주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등 깨알 같은 팁도 알려줬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건 진심으로 아껴주라는 말이었는데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라고 나는 그런 운명을 찾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말에 질색하던 해준형이 생각나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외에도 예스님은 내 아랫입술을 한 번 물었다가 귓가에 속삭이고 귓바퀴를 핥아올린 후 또 다른 이야기를 속삭이는 식으로 나도 몰랐던 내 몸의 감각을 깨워주면서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그는 마치 섹스를 전공한 사람 같았다. 말씀하시는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메모장에 받아 적고 싶을 만큼 구구절절 의미 있는 말이었지만 그가 내 허벅지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아쉽게도 그럴 수 없었다. 



[장백기] 형 어딤

[강해준] 집

[장백기] 사당인데 이리 와서 술 좀 사줘

[강해준] 동식이 같이 간다?

[장백기] 언제는 따로 왔고?


[장백기] 어딤

[한석율] 왜

[장백기] 사당으로 와라


한석율은 내 메시지를 읽고도 답이 없었다. 혼자 앉아 맥주 한 병을 비울 때쯤 유리문 너머로 동식형의 뽀글뽀글한 머리가 보였다. 해준형이 반걸음 빨리 걸어와 문을 열어주자 익숙한듯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꽂은 동식형이 먼저 술집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오던 해준형은 어느새 동식형보다 먼저 와 동식형의 의자를 빼주었다. 그게 유난스럽지 않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걸 이제야 인지한 내가 신기했다.


“형은 동식형 어디가 그렇게 좋아?”

“그게 궁금해서 술 사 달랬냐?”

“강해준. 후배 훈련 좀 다시 시켜라. 얘가 내 매력을 몰라보는데?”


동식형이 술을 주문하려고 한 손을 들어 올리며 해준형에게 말했다. 그에 해준형은 동식형의 팔을 내려 손을 자기 허벅지 위에 얹어놓고 여기요, 하고 종업원을 불렀다. 동식형의 손등을 감싸 테이블 아래로 잠시 감췄다가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멀어지자 다시 허벅지 위에 얹어놓는다. 내가 멀건 눈으로 그 손에 초점을 두고 앉아있으니 해준형은 동식형의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이래서 좋아.”


영문을 몰라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해준형은 동식형의 손바닥에 한 번 더 입을 맞추고는 아쉽다는 듯 다시 허벅지 위에 내려놓고 말했다.


“내가 맘껏 사랑하게 해주니까.”

“7년이나 만났는데?”

“7년이나 만났으니까.”


이번 대답은 동식형이 대신 했다. 그러자 어떻게 알았냐는 듯 해준형이 동식형의 머리카락 안에 손가락을 넣어 가볍게 헝클였고 둘은 깊은 눈을 마주보고 웃었다. 시발. 괜히 불렀어. 괜히 물어봤어.


“한석율이 너 요즘 바쁘다던데 이 시간에 왜 이러고 있냐?”

“형... 나 아무 느낌이 안 나.”

“뭐가?”

“뭐긴. 번개 얘기구만. 몇 명이나 만났는데?”

“세 명.”

“뭐 진짜 좆만한 애들만 만난 거 아니고?”

“형 에릭 알지? 그 ㅡ에 그 배우.”


내가 몸을 앞으로 숙여 유명한 게동 품번을 작게 속삭였다. 


“에릭보다 크다고는 못하겠는데 그만한 남자도 있었어. 근데...”


나는 후우, 한숨을 내쉬며 표정으로 뒷말을 대신했다. 그 때 술집으로 한석율이 들어왔다. 


“장백기 고자됐단다.”


해준형의 거침없는 선고에 가방을 어깨에서 풀어놓던 한석율이 그대로 굳었다. 나는 땡, 해주듯 그의 다리를 툭 쳤다. 그제야 의자에 앉은 한석율은 나를 진짜 어디서 진단이라도 받고 온 사람처럼 안쓰럽게 바라보며 내 두 손을 모아 제 가슴 앞으로 그러쥐었다.


“꺼져. 여기 어떻게 알고 왔냐?”

“아까 동식언니랑 연락했어.”

“톡은 왜 씹어. 뭐하고 있었는데.”

“두 달 전에 잤던 앤데. 장소 있다고 보자길래. 아니 근데 고자는 뭐야?”



처음은 작은 체구에 베이비펌을 한 남자였다. 체격이 예스님이랑 비슷해서 만나자마자 흥분되고 좋았다. 예스님이랑 했던 것처럼 할 줄 알고 분위기를 잡았더니 앙칼진 목소리가 날아왔다.


“새끼야. 후장섹스 안 할 거면 뭐 하러 여기 나와. 어이없는 새끼네 진짜? 이거 이거 완전 쏘시오패스 아냐?” 


나는 얼결에 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 진짜 그렇게 됐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해보자 생각하고 집중했다. 아까는 눈을 홉뜨고 잡아먹을 듯이 굴더니 막상 박으니까 순한 양처럼 굴었다. 얼굴도 반반하고 몸도 내 식이라 좋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내 느낌은 어어 들어간다, 가 다였다. 모니터로 보던 동영상이 눈앞에서 플레이되는 그 정도? 집에 오는 길에 어떤 상실감 같은 것이 찾아왔지만 어쨌든 나는 탑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에 만족했다.


두 번째는 동식형만 했나? 동식형보다 좀 큰가? 딱 베어였다. 가슴에 털도 있고. 내가 바텀인 걸 확인했으니까 탑으로 만났다. 그는 말도 없고 매너도 없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아직 개통전이라고 했는데도 아랑곳 않고 제 멋대로 넣고 흔들었다. 너무 아프고 짜증나서 당장 꺼지라고 욕이 쏟아지려는 걸 매너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를 악 물고 참았다. 근데 적반하장으로 욕은 그 쪽에서 나왔다. 


“미친년아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씨발 이게 진짜. 야이 멍청한 년아. 씨발 미친년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진짜!”


내가 영문을 모른 채 덜덜덜 떨자 그가 좋아서 하는 욕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짜게 식었다. 이건 너무 별로여서 탑 바텀을 논할 수 조차 없었다. 나는 충격으로 한동안 잭디를 열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늘. 오늘 만난 남자는 멀쩡했다. 얼굴도 해준형 못지않게 잘 생겼고. 경상도 사투린지 이북 사투린지 애매하게 들리는 말투로 자기는 올이라고 하길래 나도 올이라고 하고 사이좋게 한 번씩 했다. 매너도 얼굴만큼 젠틀했다. 덕분에 아프지도 않았고 역시 좋지도 않았다. 아무 느낌이 없었다. 나는 정말 고자가 됐나 보다. 예스님이 내 동정과 함께 성욕도 가져가셨나보다. 아찔했던 세 번의 썰을 마치자 한석율이 진지한 눈빛을 했다.



“배끼.”


나는 흠칫 상체를 뒤로 뺐다. 한석율이 나를 이렇게 부르면 나는 불안해진다.


“혹시 게이 아닌 거 아니야? 여자랑 안 자봤잖아.”


한석율의 말에 나만 빼고 세 사람이 동시에 허리를 꺾으며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마른안주를 한 움큼 집어 세 사람의 얼굴에 골고루 던져주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호모새끼들.. 술맛 다 버렸네. 에이 더러워 나가자."


쾅, 하고 테이블을 내려치는 소리를 따라 작은 욕지거리가 이어지고 내 뒤에 앉은 테이블에서 아저씨 셋이 일어나 술집을 나갔다. 우리는 일순 아무말도 않고 각자의 앞에 놓인 잔만 내려다봤다. 


"형.. 미안... 괜히 내가 이리로 불러내서.."


그런 눈빛과 폭력은 당할만큼 당했는데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남자끼리 모여서, 여자끼리 모여서, 남녀가 모여서도 음담패설을 하지만 게이가 하면 혐오가 된다. 우리의 섹스도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존재도 죄가 아닌데. 우린 죄를 뒤집어쓴 마음이 된다. 저들은 오늘 우리의 대화만으로 게이를 단정짓고 더럽다고 손가락질하고. 우리 존재에 대한 부정을 이어갈테니까.


"종로라고 이태원이라고 뭐 다르겠냐. 일어나자 나 내일 첫교시 수업있어."


동식형의 말에 우린 모두 대꾸도 없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들을 먼저 보내고 한석율과 택시에 나란히 앉았다. 내가 창밖만 내다보고있자 내 눈치를 보느라 안절부절하는 한석율이 느껴졌지만 대거리를 해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마디도 않고 우리동네에 도착했다. 잘 들어가라고 택시문을 닫으려는데 한석율이 부득부득 나를 따라 내렸다. 내 자취방을 향해 걸으며 한석율이 짐짓 밝은 목소리를 냈다.


"포비아들 신경 쓰고 살아야 했으면 난 진작 자살해버렸을 거야."


내가 대꾸없이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죄책감 갖지 마. 솔직하게 살자 우리. 평생 속이면서 살고 있잖아.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는 사람들을 속여야하고.. 난 적어도 우리끼리 있을 때만이라도 솔직하고 싶어. 형들도 그럴 거야. 내가 좋아하는 거 좋다고 말하고 싶어. 우리끼리 모여서도 눈치보느라 조심해야 한다면... 나 좀 슬플 것 같애."


내 앞에 선 한석율이 눈꼬리와 입꼬리가 만날듯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를 보고 전염되듯 나도 따라 웃어버렸다.



게이의 시간도 포비아와 함께 흘렀다. 그리고 가을이 왔다. 


[장백기] 종로로 다 나와


딱 한마디 메시지를 돌렸을 뿐인데 다들 내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곧장 달려와줬다.


"오늘도 별로였어?"

"생각도 하기 싫어. 후... 시발.. 명대사만 한 번 말할 거니까 더 묻지마."


나는 물컵에 소주를 들이 붓고 그대로 쭉 들이켠 후 눈을 질끈 감고 국어책 읽듯이 다다다 읊었다. 


“당연히 결혼했지 집에 너만 한 애도 있어 보지보단 후장이 맛있더라 엎드려 이 썅련아.”


흉한 사건을 제보하는 마음으로 뱉어내고나니 소주 때문인지 말 때문인지 입이 썼다.


“대ㅡ박.”

“존나 멋진데?”


동식형과 해준형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낄낄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년들 많아. 나도 몇 번 만나봤잖아.”


그 와중에 한석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시발 한석율. 니가 고2때 고래 잡은 이튿날 딸치다 병원에 실려 가는 거 본 이후로 이렇게 존경스럽긴 처음이다. 사람이냐?


“그래서. 엎드렸어?"

"썅련인데 냉큼 엎드려 드려야지."


서로 묻고 답하면서 또 형들끼리 낄낄댔다. 나는 해준형 앞에 놓인 소주병을 가져다 다시 물컵에 따르려다 그냥 그대로 입에 대고 쭉쭉 들이켰다.



"여,여보세요? 마복렬입니다. ㅡ 아이구우 우리딸! 근데 이건 누구 번호예요오? ㅡ 으응? 지금 어디예요! ㅡ 알았어. 아빠가 지금 바로 갈테니까 거기서 기다려요오. 나쁜 아저씨 따라가면 안 돼요!"


가짜 프로필에 속은 것도 억울한데 갑자기 욕을 하며 엎드리라는 말에 주춤주춤 몸을 빼고있을 때 마침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축 늘어진 꼬추를 바지에 쑤셔넣고 후다닥 나가는 남자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이 잔상처럼 뇌리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새 소주를 까서 입술에 갖다댄 순간 앞에 앉은 해준형이 내 손에서 소주병을 뺏었다.



"술도 약한 놈이 뒈지고 싶어?"

"뒈지긴... 나는.."


빠르게 퍼지는 술기운에 입술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푸우, 숨을 뱉으며 입을 풀었다.


"나는.. 게이섹스킹이 될 거야. 존나 게이섹스킹!!!!!!!"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자 저쪽 테이블에 앉은 남자 둘이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쳐줬다. 한석율은 아무리 게이바라도 그 단어는 너무 쪽팔린다며 나를 얼른 자리에 끌어 앉혔고 동식형은 무심하게 그거 되려면 고자치료부터, 라고 말했다. 폰을 꺼내려고 주머니를 뒤지는데 취했는지 자꾸 손이 헛나갔다. 결국 한석율이 꺼내준 폰을 들고 잭디를 열었다. 나 오늘 종로에 있는 놈들이랑 다 섹스할 거야. 다 죽었어.


"악!!!!!!!!!!"


내가 비명과 함께 폰을 쥔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다시 벌떡 일어나자 형들과 한석율이 동작을 멈추고 놀라 올려봤다. 아까 나에게 박수를 보내준 남자들은 내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할지 기대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예,예스님... 예스님이다.. 예스님이야!"

"뭔소리야. 얘 기독교였냐?"


내 말을 예수님으로 들은 동식형이 물었고, 해준형은 자기도 몰랐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예스님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 한석율만이 내 말을 알아듣고 내 폰을 제 쪽으로 당겼다.


"어디 봐 어디 봐. 어? 이 언니라고?" 

"언니? 너 알아? 너 이 사람. 예스님 알아?" 

"친구사이(*게이인권운동단체)에 그래언니잖아. 니가 말한 예스님이 그래언니였어? 아 그래서 예스였구나."

"뭐. 친구사이에 장그래?"

"형은 또 어떻게 알아?"

"소식지에 인터뷰 좀 해줄 수 없냐고 연락온 적 있어."

"번호. 번호 빨리."

"없지 인마. 작년인가 그랬는데."


해준형의 폰을 찾아 주머니를 뒤적이던 손을 멈추자 한석율이 자기가 안다며 번호를 찍어줬다. 잭디에 뜬 거 보면 지금 사무실에 있을 거라는 말도 붙였다. 나는 한석율의 볼에 입을 쪽, 맞추고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친구사이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향해 미친듯이 달렸다. 입 밖으로 나왔다가 흩어지는 숨에서 소주냄새가 났다. 달리면서 들이쉬는 공기를 감당하지 못한 폐가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멀리 건물에서 나오는 예스님이 보이자 멈출 수가 없었다.


"장그래!"


내 목소리가 닿을 거리에 다다라서야 나는 멈춰서 허리를 숙이고 숨을 골랐다. 놀란 눈으로 돌아보는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번엔."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내가 좋게 해줄게요."



가늠하건대 정확히 한 시간 후 나는 예스님, 아니 장그래 아래에서 교성을 지르고 있었다.


장그래도 그 날 처음 잭디를 깔았다고 했다. 누드 사진들 속에서 고운 손 하나가 꽤 청순해보여서 끌렸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는 애널섹스를 한번도 안 해봤다고 했다. 거짓말. 날 이렇게 죽여놓고. 어쨌든 글로 배운 섹스란 걸 들킬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의외로 내가 너무너무 좋아해서. 아 좀 부끄럽다. 내가 좀 발정난 것처럼 굴긴 했지. 아무튼 자기도 너무 좋았지만 애널까진 자신이 없어서 도망치듯 나갔다고 했다. 


"근데 왜 다시 연락 안 했어요? 잭디에서도 안 보이고.."

"일이.. 좀 있었어요."


장그래가 믿고 따른다는 사무장은 나도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아는 오상식이었다. 인권센터에서 오래 일한 그는 오픈리 게이로 유명했다. 큰 수술을 앞둔 그에게 병원은 파트너는 보호자가 될 수 없었다고 했다. 20년 넘게 함께 살고있는 파트너가 보호자가 아니면. 대체 누가. 스무 살에 가족에게 커밍아웃한 후 버림받아 지금까지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내는 부모님은 그의 수술 소식에도 완강하셨단다. 속이 타는 장그래가 부모님이 계시는 부산에 내려가 아예 짐을 부려놓고 매일 찾아가 사정했다고 했다. 마음이 약해진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동의서에 싸인을 해줬고, 장그래는 오상식 어머니의 품에서 크게 울었다고 했다. 


"수술은 잘 끝났고 지금은 회복실에 계세요. 그래서 예스는 잭디에 다시 들어갔고 스카이님을 만난 거죠. 아니다. 장백기를."


걱정으로 일렁이는 내 눈을 읽었는지 장그래는 이야기를 마치며 리듬감있게 내 이름을 말했다. 내 눈을 마주보고 입꼬리를 올려보이는 그의 눈이 큰 호수를 품은 듯 깊었다.



겨우내 우리는 섹스를 했다. 운명처럼.



“니가 내 동정 가져가서 나 너무 좋아.”


나는 모로 누워 한쪽 팔을 세워 머리를 괴고 천장을 보고 누운 그래를 내려다보며 벙싯벙싯 웃었다. 까만 눈동자를 천천히 깜박깜박 감았다 뜨더니 갑자기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첫 키스는 누구랑 했어?”

“당연히 너! 지...”


나는 모쏠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예스님이 첫 키스였는데 불현듯 불쾌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는 그걸 놓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앉아 재밌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캐물었다.



때는 중3. 수련회. 한석율이 나를 좋아하던 때다. 저녁을 먹을 때쯤부터 비가 쏟아져 일정이 취소되고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우리 반은 큰 방에 모여 둘러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무서운 이야기를 풀어놨다. 한석율은 우리 반이 아니었지만 그 때 한창 나를 좇아다니던 때라 자유시간에 우리 반에 와 있었다. 귀신 이야기가 무르익자 밖에서 천둥이 칠 때마다 한석율은 내 팔에 엉겨 붙었다. 그 즈음 아웃팅과 괴롭힘을 못 견디고 자살하는 성소청소년에 대한 뉴스를 어렵지 않게 접했던 터라 나는 안 그래도 걸커 한석율을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엉겨 붙은 한석율을 좀 심하게 밀어내자 그는 입을 삐죽이며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 빙 둘러 앉은 우리 반 애들을 훑어보니 이상하게 보는 눈은 없는 것 같아 안심했다. 너네 방으로 가라고 몇 번을 다그쳐도 한석율은 내 옆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계속 옥신각신하면 더 이목을 집중시킬 것 같아 관두고 한석율을 등지고 누워 옆에 누운 친구 쪽으로 바짝 붙어 눈을 감았다. 낮에 한 산행으로 금방 졸음이 밀려왔다. 넓은 방안에 애들이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얕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올 때쯤 한석율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배끼...”

“.. ㅇ... 으응..”

“배끼..”

“.. 어... 왜..”

“나 무서워. 귀신 나올 것 같애.”

“응..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귀신이 왜 와...”

“배끼...”


작게 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뭔가 물컹하고 입술에 닿더니 입 안으로 뜨거운 게 훅 들어왔다. 나는 놀라 눈을 번쩍 뜨고 기겁을 하며 도리질을 쳤다. 그 때 난 한석율의 입술이 싫었다기보다는 이걸 지금 누가 볼까봐 너무 겁나고 무서웠다. 허공에 마구 손을 휘저으며 한석율의 얼굴을 밀어냈는데 순간 손가락 끝이 따뜻해졌다. 어둠속에서 눈을 찡그려 초점을 맞춰보니 한석율의 콧구멍에 꽂힌 내 왼손 가운데 손가락이 두 마디 정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몇 초가 흘렀을까. 누군가 멈췄던 코골이를 다시 시작하는 소리에 정신이 들어 손가락을 슬며시 빼내자 한석율의 코에서 시뻘건 피가 콸콸 쏟아졌다. 그리고 한석율은 나를 좋아하던 마음을 접었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웃겨서 나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재연을 해 보였는데 정작 그래는 재미없어 보였다.



“재미없어? 이거 듣고 안 터진 사람 못 봤는데 그동안? 그 때 아주 피가 그냥 와아..”

“... 한석율 죽여 버릴 거야.” 

“그,그래야..”

“한석율 내 눈에 띄면 대가리 깨버린다고 전해. 아니야 전하지마. 전화번호 지워버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허공에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러대는 그래가 너무 무서워서 귀여웠다. 



겨우내 우리는 사랑을 했다. 운명처럼.



그리고 여름이 왔다. 하늘은 파랗고 무지개들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내리쬐는 태양에 사람들은 연신 부채질을 했지만 무지개깃발은 바람이 좋은지 하늘 높이 몸을 흔들었다. 기분이 좋았다. 그래의 코에 얹어진 라이방이 얼굴의 2/3는 가리는 것 같았다. 좋아. 아주 좋아.



“우리 커플티라도 입고 갈까?”

ㅡ 행사랑 상관없는 사람들도 지나가다 볼 텐데?

“사람들이 장그래 얼굴 보는 거 싫은데.. 내꺼라고 써 붙여야 되는데.”

ㅡ 나는 장백기 내꺼라고 붙이고 싶다.

“그냥 아예 가지 말까. 나 벌써 속상해지려고 해.. 아! 우리 전에 산 라이방 같이 쓰고 가자.”

ㅡ 응 좋아. 그러자.

“흔하니까 커플템 느낌도 덜 하고, 장그래 얼굴도 가리고. 딱 좋다! 아 좋다! 해결!”


어젯밤 통화에서 신이 난 내 말에 그래는 치이, 하며 이런 내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사람 많으니까 내 손 절대 놓지 마.”

“네 엄마.”


장난치는 그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놓자 그래가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았다. 응? 하는 눈으로 쳐다보니 가방에서 뭘 꺼내 내 손목에 둘러줬다. 얇은 페브릭, 레더, 메탈 소재가 얽힌 팔찌였다. 손목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응? 하는 눈으로 쳐다보니 그래는 싱그럽게 웃으며 제 손목에도 똑같은 팔찌를 둘렀다.


“오늘 커플템 한 거다 우리?”


이런.. 시발. 사랑스러워 미치겠네. 내가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그래의 양 볼을 감싸 키스하려고 고개를 살짝 꺾어 달려들려는 걸 눈치 챈 그래가 내 손이 그의 볼에 닿기도 전에 얼른 낚아채 꼭 쥐었다.


“가자!”


내 손을 잡고 끄는 그래의 얼굴을 보며 나는 히, 웃어버렸다. 맞잡은 손목에 똑같은 팔찌가 반짝였다. 


신촌은 행사 부스와 사람들로 가득했다. 알록달록 화려한 부스와 깃발을 보며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퀴어퍼레이드가 뭐야? 하며 지나갔다. 행사 부스에서 부채를 하나 받았다. 나는 얼른 그래를 향해 부채질을 해줬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라고 적힌 작은 부채가 그래에게 시원한 바람을 솔솔 불어줬다. 그래는 좋은지 잡은 손을 제 쪽으로 당겨 나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행사가 시작되고 바람 한 점 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인파 속에 갇혀있었지만 옆에 선 그래에게서 청량한 냄새가 풍겨 마음이 시원해졌다. 나는 그래쪽으로 몸을 기울여 귀를 핥을 듯이 깊게 속삭였다. 


“뒤풀이 가지 말자. 오늘 너 집에 안 보낼래.”


잡은 손은 놓지 않고 다른 손으로 내 허리를 쿡 찌르며 샐쭉하게 웃는 그래를 보며 생각했다.


‘아 섹스하고 싶다! 그래랑.’












+ 마무리 코멘트 



2015년 이 시간, 나랑 함께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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