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youtu.be/puu2Enbb4bs





어떤 관계 3 











"네, 이상 네트워크 오상식입니다."

"차장님, 죄송합니다. 저 장백기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어 그래, 오랜만이네? 그런데 왠일이야. 회사 전화로. 원인터에서 뭐 협조 요청이라도 있는거야?"

"아 하하;; 그게.. 죄송합니다. 차장님, 혹시 장그래씨 회사 나왔습니까."


난처해하는 백기의 말을 대답 없이 수화기 뒤로 넘기며 상식은 사무실 한 구석에서 열심히 자료를 복사하고 있는 작고 동그란 머리통을 찾았다.  




"응. 여기 있어. 왜."

"아 그게.. 장그래씨가 아침부터 계속 연락이 안되서요." 

"그래?"

"네...."

"... ..."

"... ..." 



"장백기,뭐, 왜.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뭐하자는 거야. 자네, 나랑 지금 썸타나???"

장백기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부산스럽던 그래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춘 것이 계속 그래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상식의 눈에 그린듯이 잡혔다.  

  


"하하하 아닙니다;; 그럼 장그래씨 좀 바꿔 주십시오, 차장님."



"장그래! 장백기가 너 찾는다!"


천천히 복사기 앞에서 뒤돌아 서는 그래의 얼굴은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는 상식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주섬주섬 자신의 자리에 가서 책상 위며 의자에 걸어놓은 재킷 속 같은 것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화기를 들고 그래가 하는 양을 묵묵히 지켜보던 상식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장그래 부장님, 지금 뭐하세요~~~~~  부장님~~~ 전화 오셨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제 핸드폰이...."

"너 오늘 집에 핸드폰 두고 나왔다며!!!"

"아..."


그래는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얼른 오차장에게 뛰어와 전화를 건네 받았다. 오차장은 전화를 받는 그래의 옆열굴을 호기심 돋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네.""그렇죠." "응." "그건 좀...그런데.. 어떻게......" " 하...알겠습니다." 


무슨 내용을 주고 받는지는 몰라도 저게 반말인지, 존대인지 모를 표현이 이어지는 것도 웃겼지만 전화를 받는 짧은 시간내에 그래의 표정이 아주 다채로워서 상식은 이것봐라,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상식은 어느덧 전화를 끝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장그래의 뒤통수에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대? 장백기랑은??"



장백기가 이 동네에 산다는 것은 상식도 그간 자주 마주쳐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회사에 전화를 하고 받는 백기와 그래는 자신이 파악한 관계 지도에는 없는 그림이었다. 그래의 동기들 각각에게 애정이 컸던 상식은 왠지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난 이 상황이 묘하게 거슬렸다. 지금 자신의 물음에도 장그래는 부스스 웃으며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래? 원인터 지진이라도 났대?"


"아닙니다. 차장님. 장백기씨가 추진하던 계약을 오늘 상대업체 본사에서 체결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그 쪽에서 최종적으로 초기에 제시받았던 자료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별 필요 없을 줄 알고 백업해가지 않았다는데 그게 장백기 씨 집 컴퓨터에 있어서 제가 가서 좀 보내줄 수 없겠냐고 하네요." 


"장그래, 너 장백기 집까지 드나들고 그래?"

"아닙니다!! 그냥 어딘지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안 가."

"네? 아.. 그게 저.. 퇴근시간도 아직 좀 남았고..."



퇴근시간은 30분 정도를 앞두고 있었다. 시계를 흘깃 본 상식은 방금 장백기의 전화 전까지 검토하던 자료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그만 가 봐. 기다리는 사람 애탄다."

"...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차장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상식은 책상에서 눈을 들어 답 인사도 받지 않고 후다닥 챙겨서 급하게 나서는 그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흠... 장백기... 장백기 그 녀석이란 말이지. 






"미안해요. 내가 지금이라도 집까지 가면 가는데 돌아올 땐 또 한참 퇴근시간이라서요. 우리 집 아파트는 알죠? 101동 1205호에요. 열쇠는 동 앞 관리사무소 아저씨가 갖고 계세요. 내가 전화해놓을께요. 바탕화면에 오늘 날짜로 된 폴더 있어요. 압축해서 메일로 보내주면 됩니다." 




언젠가 백기는 그래에게 자신의 부모님은 고지식한데가 있으신 분들이라 디지털 도어락보다는 아직 열쇠를 이용해 문단속 하기를 좋아하셨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백기의 아파트 앞에서 인자해보이시는 할아버지 뻘 관리원에게 얘기로만 듣던 그 열쇠를 건네받은 그래는 천천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1205호 현관문 앞에 섰다. 


쿵- 쿵- 손잡이를 잡고 그래가 두어번 그렇게 백기의 아파트 현관문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동안 백기의 집에 한번도 와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언제였더라. 백기네 아파트에 주차해 놓은 백기 차 안에서 노트북으로 같이 영화를 본 날이었나. 그 날 상가 화장실을 이용하려던 그래를 백기가 말려서 그 때 한 번.. 


그래는 손이 하얘질 때까지 손잡이를 힘줘서 움켜잡았다. 회사에서 백기의 집으로 오는 내내 머리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탁을 들어주는 것 뿐이라고 계속 생각을 하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널을 뛰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남의 집에 이런 식으로 혼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확히는 남의 집이 아니라 백기의 집이었으니 그래는 생각의 끝에 급기야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라면, 나라면 못 그럴텐데. 내가 없는 내 집, 내 방안. 가장 나의 내밀한 공간에 장백기를 홀로 들인다. 머릿속에서 그래의 방안을 가볍게 돌 듯 둘러보는 백기가 자신과 눈이 마주칠 것 같아 그래는 손잡이를 꾹 잡은 채로 눈도 함께 감아버렸다. 분명 말도 안되는데. 말도 안되게 부끄러운데. 하지만 백기가 자신의 방 안에 홀로 서 있는 방금의 상상만으로 그래에게 분명 다른 형태의 감정이 잡혀졌다. 그 것은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뭐라 정의내리기도 어려운, 그럼에도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건 희열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래는 그 생각 끝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찰칵-. 그렇게 결심한듯 조용하게 그래는 백기의 집에 들어섰다. 


낮게 가라 앉은 시침 소리가 집안에 울리고 있었다. 극도로 긴장한 상태로 그래는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가로질러 거실에 있는 컴퓨터 책상으로 향했다. 부팅이 되길 기다리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집안을 돌아다봤다. 늦은 오후 마지막 해가 길게 들어찬 거실은 따뜻한 색으로 가득차 있었다. 별다를 것도 없는, 백기의 취향보다는 노부부의 강직한 손길이 묻어나는 이 곳에서 백기는 하루를 마무리하고 또 시작할 것이다.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던 그래는 때마침 울리는 컴퓨터 부팅음에 화들짝 놀라 얼른 해야 하는 일을 마무리하고 컴퓨터를 끄고 일어났다. 조심조심 거실을 걷는데, 내 딛는 걸음 끝을 마치 바늘로 찔러오듯 그래의 심장이 찔려왔다. 서둘러 나가려던 그래의 눈에 주방의 식탁 위 정리되지 않은 사과껍질이 담긴 쟁반이 걸렸다. 



"아침부터 바빴나 보네, 진짜."



깔끔한 성격에 그냥 두고 갈리 없는 흔적이었다. 분명 저 상태로 두면 돌아와서도 보는 기분이 불편할 백기가 그래는 걱정이 되었다. 결심한 듯 그래는 주방에 들어서 비닐봉지를 찾았다. 하지만 비닐 봉지에 담고 보니 자신이 그걸 들고 백기의 아파트 음식물 쓰레기 수거장에 버리는 행위까지는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보였다. 한숨을 내 쉰 그래는 집에서 하는대로 그냥 얼려버리기 위해 냉장고의 냉동고 문을 열었다. 


우당탕탕- 


"으아악-"


냉동고 문을 열자마자 정체 불명의 딱딱한 비닐 봉지가 튕겨나와 그래의 발등에 떨어졌다. 부지불식간에 발등을 얻어맞은 그래는 눈물이 핑돌만큼 아파서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퍼......."


주저 앉아서 훌쩍훌쩍 맺힌 눈물을 닦고 있자 그래는 웃음이 나왔다. 장그래. 진짜 뭐하자는 거야. 이게. 왠지 눈물을 빼고 마음이 가벼워진 그래는 튀어나온 내용물들을 잘 수습해 냉동고 한 켠에 밀어넣고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으며 설핏 본 현관 신발장 위에 작은 향수병이 있었다. 그래는 홀린듯이 향수병의 마개를 열었다. 어디서든 존재감 있게 느껴지던 그 백기의 냄새였다. 꽤 썼는지 얼마 남지 않은 양의 향수병을 이러저리 돌려보던 그래는 다시 한번 텅 빈 백기의 집안을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에도, 자신이 머물다 간 흔적이 남지 않겠지만, 자신은 이렇게 백기의 집에 다녀간 것을 어떤 형태로든 기억에 남기고 싶었다. 



칙-칙-  칙-칙- 



팔목에 두 번, 귓가에 두 번. 

조심스레 노즐을 누르자 차가운 것이 예민해진 살에 닿는게 느껴짐과 동시에 강렬한 백기의 향이 그래에게 남았다. 그래는 향수병을 원래 자리에 잘 돌려두고 그대로 문을 열고 나와서 열쇠로 문을 잠갔다. 씩씩하게 백기의 아파트를 나서는 그래의 양복 주머니에서는 열쇠의 짤랑거림이, 손목과 목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백기의 향이 올라왔다. 그래서 그래는 집에 가는 길 동안 그 묘한 흥분감을 계속 기억할 수 있었다. 










「집입니까?」 


「네. 계약 뒤풀이 중?」


「응. 오늘은 간단히.」

「오늘 고마웠어요. 덕분에 잘 끝났어요.」


「잘 됐다. 걱정했는데... 계약 따낸 거 축하해요. 빨리 들어가 쉬어요.」


「그런데...집 열쇠가 없어.」


「거짓말.」


「ㅎㅎ 나 어디게요??」


「거짓말... 너 술 많이 마셨어?」


「잠깐 얼굴만 보여줘요. 오늘 고맙기도 하고 얼굴 까먹을 것 같아서 왔어.」



그래는 액정이 불빛이 사라질때까지 그대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아까는 자신이 백기의 집 앞, 그리고 지금은 백기가 자신의 집 앞에 있었다. 장백기는 지금 뭘 기다리고 있는 걸까. 너는 우리 집 앞에서, 아까 나와 비슷한 걸 느끼고 있을까. 너도 그런걸까. 나처럼. 자꾸 알고 싶고, 닿고 싶고. 그럴까. 



대답하듯 부르르 부드럽게 핸드폰이 진동하며 밝아졌다.   





「장그래. 그래야...」


「응, 기다려요.」







가로등에 기대 서 있는 백기는 드물게 담배를 물고 있었다. 저 얼굴을 못 본지 두 달 째였다. 자전거를 타다 백기가 그래의 회사 앞에 온 이후에 막바지 계약에 힘쓰느라 백기가 바빴던 탓이었다. 바쁜 걸 알고 있기도 했지만 여전히 백기에게 먼저 연락을 하는 건 어색했던 그래는 이렇게 일이 끝나자마자 자신에게 먼저 와 준 백기가 고맙고 반가웠다. 마음처럼 반갑게 그래가 다가서자 백기가 한 걸음 물러섰다. 



"냄새 나."

담배 연기를 손으로 정리하며 백기가 웃었다. 


"2차까지 고깃집이었고 거기다 술에 담배에 장난 아냐."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그래는 백기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또 백기가 물러설까봐 서둘러 백기의 양복 앞 끝 자락을 슬며시 잡았다. 




"응, 내가 그러는거에요. 괜히."

"차는?"

"회사에 그냥 두고 왔어요."



그래에게 양복 끝자락을 잡힌 채로 백기가 그래와 시선을 맞추며 가로등 옆 벽에 고개를 기댔다. 


"우리 집 많이 더러웠죠. 나 오늘 아침에도 진짜 몸만 빠져나왔어. 그래서 장그래 욕했겠다. 했지. 더럽다고.."

"더럽진 않고... 냉동고 정리는 좀 해야겠더라."

"냉동고? 냉동고는 왜 열었어요?"

"식탁 위에 있던 사과 껍질 넣어두려고. 열었는데 이렇게 큰 게 발등으로 떨어져서 얼마나 아팠는데."

"어~~~어.. 혼자 사는 남자 세간살이를 그렇게 막 함부로 열어봐도 되나? 침실이랑 다 열어본 거 아니에요? 막 옷장도 열어보고? 내 침대도 누워보고?? 안 되겠네 장그래."

"아니거든!!!!!!! 진짜!! 아니야!!!!!"



흐흥흥~ 백기는 펄쩍 뛰는 그래가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억울해하는 그래를 달래려는 듯 아직 자신의 양복 앞 자락을 쥐고 있는 그래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놔줬다.  



"이제 말해봐요."

"뭘."

"장그래가 지금 장백기한테 해줘야 하는 말."

"그게 뭔데."

"기억 안 나?"

"응"


"내기, 우리 내기요."


그래는 그제서야 백기와 했던 내기가 기억이 났다. 백기는 평소에도 사소한 것에도 내기를 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 72분의 통화 어느즈음에서 그래와 백기는 예의 그 내기를 했던 것이다. 




"그렇네요. 지금 제일 문제는 장백기씨잖아요. 하기 싫은 거."


"인정. 아무리 장기계약이라 신중한 건 이해를 한다쳐도, 이 건 진짜 너무하는 거지. 의욕이 제로에요. 나도 이제 될 대로 되라 이런식이니 계속 어긋나고."

"그러지 말고 마음 돌려봐요. 계약 성사되었을 때 직장의 인정, 보너스, 성과급, 고과반영. 계기는 많지않습니까."

"이미 많이 써먹었어. 그 동기들은. 뭔가...... 프레시한게 필요해."

"그런 게 있나?"


"나랑 내기하자, 장그래."

"내기?"

"내가 두 달안에 이 계약을 따내면 장그래는 장백기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준다. 어때?"

"못 하면?"

"두 달안에 못하거나 계약이 파기될 시에는. 장그래는 장백기의 전화나 약속을 10번 거절할 수 있다."



삶의 태반을 승부사로 길러진 그래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일단 장백기가 듣고 싶은 말이 뭔지 알고나 난 다음에 결정하죠."






그런 식의 내기였다. 그래는 내기를 쿨하게 받아들였다. 두 달의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으니 내기는 장백기의 승리였고 그래는 그 말을 해주는 게 옳았다. 그리고 방금 그 말도 아주 자세하게 그래의 머리속에 타이핑되듯 떠올랐으므로 그래는 망설임없이 발화했다. 


"장백기, 멋있다. 장백기, 장하다. 장백기는 세계 최강의 짱짱 영업맨이다."


"푸하핫....... 아 진짜..."

"왜 해달라며. 했잖아."

"안 부끄러워요? 보통은 이런 말들 부끄러워서 잘 못해요. 늘 내가 예상 못 한 곳에서 강해, 우리 장그래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있는 그래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던 백기는 기댔던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참, 여기 아파트 열쇠-"

그래가 점퍼 주머니에서 꺼내어 건넨 열쇠를 백기는 별 말없이 부드럽게 건네 받았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요. 이 열쇠를 관리원 아저씨에게 맡긴 건 분명 나를 걱정해서였겠지? 장백기가 밥하기 귀찮아 못 먹어 쓰러지는 건 아닐까. 혼자 아픈데 끙끙 앓다가 큰 병 나지는 않을까. 자신들은 둘만 알콩달콩 살러 내려가시면서도 다 큰 아들이 그렇게 걱정되셨나봐."


백기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래에게 받은 자신의 집 열쇠를 채웠다. 


"이따 집에 가서 전화드리려구요. 늦어서 주무실지도 모르지만, 오늘 아주 오래 나를 괴롭혀왔던 큰 계약을 잘 마쳤다고, 그리고 거기엔 어떤 한 사람의 도움이 컸다고. 내가 어려움에 처하면 언제든지 그 사람이 오늘처럼 와줄테니까, 이제 걱정마시라고 할겁니다."


백기가 그래에게 다시 내민 집 열쇠에는 하얗고 작은 북극곰이 달려있었다. 

 

"백돌이는 아니고, 똑같은 거로 다시 전화해서 주문했어. 그 거 아무래도 너한테 더 어울리거든. 뭐, 판매하는 직원이 묘하게 친절한 게 조금 걸렸지만 말야."



그래는 말없이 북극곰과 열쇠를 받아 다시 점퍼 호주머니에 넣었다. 

백기의 집에서 돌아올 때 무겁게 자신의 존재감을 자랑하던 백기의 집 열쇠는 이상하도록 가벼워져 있었다. 

그런 그래를 보며 백기가 다시 웃었다. 그래는 따라 웃는 대신 그런 백기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열심히 기억했다. 

자신의 호주머니 안, 소중하고 가벼운 물체가 두둥 떠오르기만 하는 자신의 감정을 따라 날아가버리고 말까봐 그래는 호주머니를 꽉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