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youtu.be/4Yc5EmiT8TY





어떤 관계 2








“아... 돌겠네... 진짜.”


그래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뜨거워진 눈을 꼭 감아 내렸다. 눈꺼풀에 작게 경련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꼭 풀을 붙여 놓은 것처럼 점막이 끈적하게 느껴져 눈을 다시 뜨기 힘들었다. 우선은 보고서의 처음을 채우기 위해 찾아야 할 정보가 너무 많았고 지금 이 단계를 마친다고 해도 저 z까지 줄지어 늘어선 일 중에 겨우 c정도나 될까. 그래는 복잡한 머릿속으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대국의 기보를 불러왔다. 깜깜해진 눈 앞에 언제나 그리운 가로 세로 19줄의 바둑판이 두둥 떠올랐다. 그래는 머릿속으로 자신의 손에 쥔 까만 바둑알을 헤아리며 하나하나 지금 하고 있는 보고서 처리의 수순을 대입했다. 이윽고 생각이 끝나고 까만 오른쪽 밑의 회점에 바둑알을 내려놓으며 그래는 기세 좋게 복기를 시작했다.



사무실에 남아서 새로운 보고서 초안을 잡겠다던 그래를 두고 다들 퇴근 하신 관계로 9시가 넘어가는 작은 사무실은 시계소리만 들려왔다.


 


드르륵- 드르륵-  

핸드폰 진동소리에 머릿속으로 막 떠올린 20번째의 수 놓기를 방해받은 그래는 상상속의 매끄러운 바둑알 대신 핸드폰을 잡아 올렸다. 




“네-”

“어디에요?”

“아직 회사입니다... 너는?”

“나는... 퇴근해서 저녁하고 지금은 자전거 타러 나왔어요.”



백기의 말에 여전히 눈을 감은 채인 그래의 눈 앞에 놓였던 바둑판이 순식간에 저만치 밀어지고 대신 그 자리를 자전거를 탄 백기가 지나쳐가는 게 느껴졌다.



작년 이맘 때 즈음 이직 후 회사 근처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도 백기는 이어폰을 낀 트레이닝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었다. 쌩하고 스쳐 지나가는 얼굴과 묘하게 시선이 마주쳤다 생각했을 때 그래는 그대로 멈춰 얼른 뒤를 돌아봤고 백기의 자전거도 그 즈음에서 멈춰섰다. 평소에 익숙하던 단정한 수트 차림의 그와 그 때 그래를 돌아보던 얼굴이 너무 달라서 반가움보다 놀람이 더 컸던 기억이 났다. 마찬가지로 반가움보다 멋쩍음이 커보였던 백기는 뒷머리를 긁으며 자전거 옆으로 다가온 그래에게 자신이 얼마 전 본가로 들어왔노라고 했다. 그래의 새로운 회사가 있는 동네는 백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었다. 백기의 부모님은 퇴직을 앞두고 서울 생활을 정리하시면서 회사 근처로 독립해 살던 백기에게 자신들이 살던 작은 아파트를 내어 주고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그래. 백기 네가 결혼을 해서 아예 리모델링해서 들어오면 좋겠지만 말이다. 원... 

넌 결혼은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으니 네 아빠랑 걱정이 많구나.’




“내가 이 동네 맛 집은 다 알고 있어요. 내가 다 알려줄게요, 장그래씨.”

핸들을 잡고 자전거를 탄 그대로 그래와 눈을 마주치고 웃으며 백기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는 옷차림만큼이나 편하게 던져진 백기의 말이 어색해 마주 웃지도 못했었다. 그러고 보니 거기서 아주 어정쩡한 표정도 지었던 것도 같고. 



그 뒤로도 그래는 회사 옆에서 다양한 백기와 마주쳤다. 익숙한 모습으로 출근하는 백기, 밤 늦게 혼자 밥먹으러 나가는 백기, 입에 담배를 물고 양손에 맥주가 가득한 편의점 봉투를 든 백기, 자전거를 타고 역시나 귀엔 이어폰을 꼽고 무서운 속도로 시끄럽게 차임벨을 울리며 그래를 지나치던 백기. 그러면서 그래는 1년간 백기와 함께 백기의 동네 맛집 리스트를 하나씩 체크해나갔고 꼭 그만큼씩 백기와 가까워졌다.  





“왜 계속 타지 그랬어-”

“혼자 타니까 재미없어. 중간에 그냥 내렸어.”


거짓말. 그래는 백기가 한번 자전거를 타면 멈추는 일 없이 정해진 코스를 성실하게 완주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중간에 내려 전화를 하는 때는 드물게 털어내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였다. 통화가 길어질 것이다. 그래는 이만 감은 눈을 뜨고 자세를 편하게 고쳤다. 




“왜 아직도 회사야. 일이 많아요?”

“네. 뭐 늘 그렇지만.”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그래는 백기에게 조근 조근 자신이 지금 쓰려고 준비하는 보고서에 대해 이야기했다. 백기는 중간 중간 긍정적인 피드백을 돌려주며 그래의 말을 들었고 곧 자신의 이야기도 시작했다. 마무리 단계에 있던 계약에 변수가 생기면서 조율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 했다. 그럴 땐 들어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는 걸 그래는 잘 알고 있었다. 얼추 나누던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갈 즈음 핸드폰이 너무 뜨거워져 들고 있기도 힘들어진 그래는 잠시 핸드폰을 귀에서 떼서 액정을 들여다 보았다. 




“7..... 72분.....”

“여보세요, 장그래-"

“장백기씨, 나 귀 너무 뜨거워요. 우리 지금 72분째 통화중입니다.”

“아... 갱신했네. 우리 43분이 최장시간 아니었던가??”



해맑게 대답하는 백기 때문에 웃음이 나온 그래는 결국 뜨거운 핸드폰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스피커 모드로 전환했다. 


“그래야, 듣고 있어?”

“응, 말해.”



멀어진 통화감 때문인지 백기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래도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그렇게 대치 상태로 있다 뭔가 기분이 간지러워진 그래가 다시 전화기를 들으려는 찰나 백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볼래?”

“지금? 아직 자전거 다 안 탔잖아요.”

“응, 돌아갈래요. 돌려서 가는데 20분 안 넘을거야.”



그래는 잠시 망설였다. 전화기 너머로 망설이는 그래의 기색이 느껴졌는지 백기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나 회사 앞 편의점에서 물 사줘요. 물통도 지갑도 다 두고 나왔어. 나 통화도 오래해서 지금 목 찢어질 것 같아.”

“그래요, 그럼. 앞에 도착하면 연락 줘.”



전화를 끊은 그래는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던졌다. 백기가 오기 전에 작업하던 것을 정리하고 일어나려는 셈이었다. 한참 찾아놓은 정보를 정리하다 옆에 놓아둔 펜이 사라진 진 걸 발견하고 여기저기 찾다 양복 호주머니에 넣어둔 펜을 꺼내는 그래의 손에 작은 물체가 함께 딸려 나왔다. 




“아... 잊고 있었네...” 


그래가 호주머니에서 꺼내 든 것은 작은 북극곰 인형이 달린 키링이었다. 평소에 사람을 잘 본다고 자평했던 그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백기는 친해질수록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 중 하나가 선물에 대한 집착이었다. 1여년의 관찰 결과 그는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세심하게 각각의 취향을 고려한 작은 선물들을 하곤 했으며 또 그들에게 선물을 받는 것에 크게 기뻐했다. 그래서 그래가 제주도로 워크샵을 떠나는 전 날 만난 저녁에도 백기는 그래에게 기념품 노래를 불렀었다. 

워크샵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백기의 부탁 아닌 부탁이 기억난 그래는 마지막 일정이었던 테디베어 박물관 기념품 샵 앞에서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이 다음 일정은 공항이었고 분명 예민한 백기는 공항에서 대충 고른 선물을 알아보고 실망할게 뻔했으므로 반드시 여기서 해결해야했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진열대 앞에서 고민에 빠진 그래에게 점원이 상냥하게 다가왔다. 



“손님, 선물하실 거 찾으세요?”

“아, 네.”

“선물 받을 분이 애인이신가 봐요. 선물 고르는 손님 눈빛이 여기 제주도 바람만큼이나 따스하세요.”


그저 닳고 닳은 물건을 팔기 위한 입바른 말에 지나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래의 귀는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여기 이 키링들은 어떠세요, 요즘 제일 잘나가는 품목이에요.”


점원이 꺼내놓은 키링 중에서 그래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바로 하얀색의 걷고 있는 아기 북극곰이었다. 그래가 눈을 못 떼고 있는 걸 알아챈 점원이 눈치 있게 아기 북극곰 키링을 그래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그래의 손바닥 위에 눈, 코, 발가락만 까만 하얗고 작은 북극곰이 얌전히 내려앉았다. 




“어머, 손님. 이 키링하고 손님하고 정말 잘 어울려요. 어쩜 그림이 따로 없네요!”

“장그래! 여기서 뭐해! 다들 공항버스 타려는데 너 없어서 찾고 다녔잖아. 어? 그건 뭐야?”


그래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김대리님이 타박하며 다가서다 그래의 손바닥 위에 키링을 보았다. 



“뭐, 조카 선물해주려고? 야, 요새 애들은 그런 거 안 좋아해. 자고로 애들은 또봇 로봇같은 걸 사줘야 좋아한다고. 어때, 내가 지마켓에서 최저가 알아봐줄까?”

“손님, 이 손님께서는 지금 조카가 아니라 애인 선물 고르고 계십니다;; ”

“에이, 뭘 잘 모르시네. 여기 장그래씨는 애인이 없어요. 모!쏠! 모쏠이라구요. 물건 파시려고 너무 애쓰시네....이 분... 하핫핫.”

“... 아니,  이 분이 지금 이 선물 애인 주실 거라는 데 여기 제가 파는 곰들 다 걸 수도 있어요, 손님.”

“글쎄요, 우리 회사가 무역회사이긴 한데 또봇이면 모를까 이런 곰 인형들은 취급하지 않걸랑요. 그래서 말인데, 아예 이번에 또봇을 팔아보시는 건 어때요?”


눈에 안 보이는 불꽃을 튀겨가며 한 판 붙을 것 같은 기세인 둘 사이를 벌려놓으며 그래가 급하게 점원에게 말했다. 



“이거, 이걸로 할게요. 계산 부탁드려요. 얼마죠?”




그런 난리를 치고 김대리에게 비행기에서 내내 구박을 받으면서 챙겨와 놓고선 잊고 있었다니... 그래는 괜히 애꿎은 북극곰의 코를 꼬집었다. 








「회사 앞. 나와요-」





회사 유리문을 열고 나가자 맞은 편 편의점 식탁 옆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앉은 백기와 눈이 마주쳤다. 백기의 눈은 예의 무감하게 가라앉은 눈이었다. 그럴때마다 백기가 예전에 멀기만 했던 그 때의 장백기처럼 느껴져 그래는 어쩐지 가슴이 내려앉고는 했다. 서둘러 길을 건너갔다. 





“가방 갖고 나왔네. 바로 집에 갈 꺼야?”

“응, 들어가죠.”


백기는 들어선 편의점 안에서 생수를 골라들었다. 


“더 필요한 건?”

“없어. 맥주가 딱 필요하긴 한데. 운동 뒤에 마시는 건 더 찌는 느낌이라 싫어.”

 




“감사합니다-”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편의점을 나온 백기는 편의점 밖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아 생수 뚜껑을 따서 그래에게 먼저 건넸다. 


별다른 말없이 그래가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돌려준 생수병을 받아 백기가 꿀꺽꿀꺽 물을 맛있게 마셨다. 


“아... 살 것 같다. 죽는 줄 알았네.”

“그러게. 아주 볼만 하네. 땀에 푹 쩔어 가지고서는...”

“어? 나 땀 냄새 나요?? 나는 안 나는 것 같은데??”


그래는 여기저기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확인하느라 난리가 난 백기를 말리며 웃었다. 

“안 나, 안 난다구.”



실제로 그래는 백기에게 땀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다. 백기가 담배를 피우는 데도 담배냄새조차 맡아본 적이 드물 정도였다. 그래가 담배 냄새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몇 번 이야기했는데도 그래를 만날 때 백기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대신 백기의 향수내음이 언제나 진하지만 결코 기분 나쁘지 않게 둘 사이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있지 않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가끔 그와 비슷한 향수 냄새를 맡게 될 때면 그래는 숨을 잠시 멈춰야 했고 다소 빨라지는 호흡을 고르곤 했다. 






“줄 거 있어요.”

“응? 뭔데?”



대답 대신에 그래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키링을 꺼내들었다. 그냥 작고 의미없는 선물일 뿐인데도 그래는 그게 또 그렇게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말을 덧붙이면 더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아무 말도 못하고 키링을 들고 조심히 백기의 기색을 살폈다. 





“아.. 제주도~” 


백기는 웃으며 키링을 건네받았다. 키링 끝에서 하얀 북극곰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뭐야. 꼭 자기 같은 것만 골랐네. 하얗고 조그맣고. 그렇게 생각하며 백기는 키링을 손바닥 위에 놓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볼 수록 그 곰은 장그래이기 보다는....



“어, 이거... 나 닮았네~~~~~ 맞죠??”


동의를 구하듯 안경 뒤에 눈을 빛내며 백기가 물어왔다. 



“응. 나 첨에 얘보고 장백기- 라고 부를 뻔 했잖아. 다른 건 눈에도 안 들어오더라구.”

“우와....... 고마워요. 맘에 들어, 진짜.” 




아... 저건 진심이다. 백기의 눈과 표정에서 만족과 감동을 읽은 그래는 마음이 더없이 흐뭇해지는 것을 느꼈다. 흠... 저런 걸 보려고 사람들이 선물이란 걸 하는 거군. 



그래는 요리조리 만져보는 백기를 그렇게 잠시 바라보다 이만 집에 가려고 일어섰다.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 그래 옆에 백기가 자전거 핸들을 잡아 끌며 나란히 걸었다. 그래는 자전거를 끌고 가는 백기가 같이 편히 걸을 수 있게 걸음 속도를 조금 낮추어 걸었다. 




“저 인형 백돌이라고 이름 붙어야지. 집에 가서 자동차 키에 끼워 놓을래.”

“그런데... 왜 그렇게 선물을 좋아해요?”

“음... 글쎄요.”


백기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래를 마주보지 않고 같이 걷고 있는 이 길의 저 어디즈음 시선을 맞추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선물 자체보다는, 그 걸 준비하는 마음과 시간을 생각해. 어떤 걸 좋아할까. 이걸 받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선물을 고르고 건네주기까지 오로지 선물 받는 상대, 그 대상을 위해 그 시간과 온 마음을 쓰는 거잖아. 그러면 딱 그만큼 나를 좀 더 좋아해주지 않을까.... 싶은거죠. 나는.”




담담한 백기의 대답은 그래의 발걸음을 그대로 멈추게 했다. 

백기는 그런 그래를 두고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몰라보게 따뜻해진 4월의 밤바람이 약간은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 바람을 타고 백기의 향수냄새가 그와 떨어진 거리를 채워오는 것 같아 그래는 몰래 숨을 크게 들어마셨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카락이 보기 좋게 내려앉은 뒤통수_ 단단해 보이는 넓은 어깨_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팔뚝_ 그리고 자전거 핸들에 올려 진 단단한 그의 손 끝에 달랑거리는 그를 꼭 닮은 하얀 북극곰_ 까지 시선이 가 닿자 그래는 왠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그래를 본 것처럼 백기가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래를 뒤돌아봤다. 








“그러니까, 어서 여기 내 옆으로 와요. 장그래.”


















+) 그래가 선물한 걸어가는 아기 북극곰 키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