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youtu.be/_SmdtvncHpY




어떤 관계 1






「퇴근 아직 안 했죠, 저녁 먹었어요?」 

그래의 핸드폰 액정이 잠시 밝아졌다 꺼진다. 백기일 것이다.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느낌이 그랬다. 슥- 터치한 화면을 밀자 오후 내내 일 때문에 곤두 선 신경줄이 더 팽팽히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용을 확인하고 잠시 고민한다. 답장을 보낼까 그냥 씹을까. 씹을 이유가 궁색하잖아. 쓸데없는 고민은 곧잘 쓸데없는 옅은 열패감으로 이어진다. 


「아니요.」 

「그럼 저녁 같이 먹자. 근처야. 회사 앞으로 갈게.」 

「응.」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뵈어요. 차장님.” 


자꾸 어깨에서 미끄러지는 가방을 고쳐 매며 회사 문 앞에서 백기를 기다리는 잠시 잠깐, 4월말인데도 오후는 꽤 바람이 찼던지라 그래는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고개를 들자 익숙한 검정색 SUV가 부드러운 턴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앞 창 유리로 마주친 백기의 눈은 지나칠 정도로 무감해보였다. 끼익- 자신의 앞에서 차가 멈추자 그래는 깡총 앞 좌석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뛰어 들었다. 미리 열선을 틀어놨는지 몸이 닿는 부분이 따끈했다. 기분이 좋아진 그래는 좌석 더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런 그래를 슬쩍 쳐다본 백기가 옅은 웃음을 물었다. 알게 모르게 백기의 기색을 살피던 그래도 그제야 편한 표정을 지었다. 익숙한 차의 냄새와 백기의 향수냄새, 그리고 차 안에 흐르는 음악까지. 굳이 내색은 하지 않지만 그래의 청각과 후각은 꽤나 예민했던 거였기에 이 모든 게 이렇게나 취향이 맞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야. 그래 머리속에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을 밀어내듯 백기가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글쎄요. 배가 고프긴 한데 딱히 없어요.” 
“그럼 그때 갔던 아시안 음식점 가자. 오늘 왠지 향신료가 땡겨.” 
“그래, 그럼.” 

존댓말과 반말이 섞인, 다른 누군가가 들으면 이상하다 여길 이 대화법은 어느 샌가 그래와 백기의 대화 일상이 되어버렸다. 원인터에서는 계속 존댓말을 써왔으니까. 동갑이라는 걸 실제적으로 인지한 건 그래가 이직을 하고 난 뒤였고. 이직을 하고 난 뒤 자신을 더 자주 찾는 백기와 어울리게 되면서 거의 말을 놓게 되었는데 옛날 버릇이 남아있던건지, 아니면 그냥 재미인지 곧잘 백기는 대화에 존댓말을 섞었다. 딱히 타박하는 성격이 아닌 그래도 존댓말엔 존댓말로, 반말엔 반말로 받아주는 바람에 현재 둘 간의 대화는 다소 웃긴 형태로 고착되고 말았지만. 


“이 노래 뭐야? 좋다.” 
“좋지? 누가 추천해줘서. 네 취향일 줄 알았어.” 
“응, 맘에 들어.” 

운전에 집중한 백기의 눈가가 휘어진다. 흠... 만족스러운 반응인가 보군. 고개를 돌려 백기를 보던 그래는 다시 반대로 고개를 돌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차들에 시선을 던졌다. 백기가 저렇게 감정이 잘 읽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자주 저러는 것 같아. 또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차안을 가득 채운 음악이 꽤나 감미로웠고 차는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으므로 따뜻한 시트위에서 그래는 자꾸 눈이 감겼다. 




끼익- 부드럽게 정차하는 느낌에 그래의 눈이 떠졌다. 

“여기서 기다려. 올라가서 자리 있나 볼 테니까 내가 이따 전화하면 올라와요.” 

막 깨서 눈을 꿈벅거리던 그래에게 백기가 자신의 차키를 건네주고 차에서 내렸다. 시간이 좀 흐르고서야 제 상황을 인식한 그래는 차에서 이렇게 혼자 기다리는 게 어쩐지 멋쩍어 서둘러 가방을 챙겨서 내렸다. 들어선 한참 식사 시간대의 음식점은 예상대로 혼잡했고 여기저기 기웃거려도 찾는 백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야--.” 

뒤통수에서 들여오는 건 분명 익숙한 목소리인데, 성을 떼고 이름만으로 불리는 제 이름은 익숙하지 않아 그래는 그대로 굳어서 눈동자만 옆으로 굴렸다. 백기가 어느새 그래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섰다. 

“막 전화하려고 했는데. 자리 있대. 저 쪽이야.” 

앞장서는 백기의 등을 보며 걸음을 옮기는데 그래는 갑작스럽게 두근대는 심장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백기가 저런 식으로 이름을 부른 적이 이 번이 처음이던가. 그럼 내가 이러는 건 그게 처음이라 그런 건가. 귀 끝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아프게 뜨거웠다. 다들 한번씩 뒤돌아볼 정도로 새빨개져 있을 제 귀를 떠올리자 그래는 밥이고 뭐고 뒤돌아 그 길로 집으로 가고 싶었다. 


“2인 세트로 주시구요. 음료는 오렌지쥬스랑 사이다로 할게요.” 

자리에 앉아 익숙하게 주문을 마친 백기가 저와 자신의 잔에 물을 따르는 걸 말없이 지켜보다가 그래는 심장도, 귀도 이만 제 상태로 돌아오길 바라며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주말에 워크샵 다녀온 건 재밌었어요?” 
“응.” 
“얼마나 재밌었으면... 전화했었는데 받지도 않고.” 
“아, 그건 대리님이랑 차장님이 계속 함께 계셔서.” 
“지금의 제주도- 정말 좋았겠다. 사진도 많이 찍었겠네. 어디 보여줘요.” 

이번에 회사에서 제주도로 워크샵 간 것을 아는 백기는 어느새 그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갔다. 휙휙 사진첩을 넘겨보던 그는 한 사진에서 웃음을 못 참고 끅끅댔다. 

“장그래씨, 이런 표정은 대체 왜 짓는 거야??” 

백기가 돌려서 보여준 사진은 그래가 사람들 속에서 입을 양껏 옆으로 늘인 다소 엽기적인 표정을 지은 단체사진이었다. 

“안 그럼 나만 너무 예쁘게 나오잖아.” 

그래가 물이 든 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쓱 흘린 진심에 백기는 웃으며 긍정했다. 

“맞아. 그래도 너무 갔다 이건.” 

한참을 들여다보던 백기는 손가락으로 뭔가를 눌러댔다. 동시에 드르륵 식탁위에 올려뒀던 백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뭐하는 건데.” 
“응, 아까 사진.” 
“그건 어따 쓰려고.” 
“나중에 너가 너무 예쁠 때 보려구.” 

으쓱한 백기가 거침없이 뱉는 말에 다시 굳어진 그래는 애꿎은 눈동자만 굴렸다. 타이밍 좋게 직원이 음식을 날라왔다. 왠지 밥맛이 천리만리 떨어진 그래는 거의 먹지 못하고 깨작거렸다. 
먹음직한 새우를 발라서 그래의 앞 접시에 놓아주며 백기가 제 혀를 찼다. 

“이봐요. 장그래씨. 혼자 사는 불쌍한 친구 밥 상대 해주는 건 고맙지만 기왕지사 맛있게 먹어주면 더 좋잖아요.” 
그래는 가타부타 대답 대신 새우를 입에 넣었다. 통통한 새우가 혀끝에서 감칠맛이 났다. 

“나 맥주 한잔 할래.” 
“차는?” 
“네가 운전하면 되지. 넌 마시지마. 대리는 싫어.” 

백기는 자신의 차를 무척 좋아했다. 3년차 독립생활의 자신의 형편에 무리해서 샀다는 고급사양의 검은색 SUV는 정기적이고 정성스런 손 세차로 매번 번쩍이는 광을 자랑했다. 다른 사람의 손 타는 것도 끔찍이 싫어해서 대리도 한번 부르지 않았지만 그래에게는 종종 핸들을 넘기곤 했다. 대리운전 알바 경험이 많은 그래의 운전 실력이 미더웠나 싶었지만 SUV는 많이 운행을 안 해봐서 어색하다던 그래에게 이것 저것 조작법을 자세히 알려주면서 백기는 종종 늦은 술자리에서도 그래를 불러 운전을 부탁하고는 했다. 



"너네 집으로 가자. 너 내려주고 난 좀 차에서 자다 깬 담에 갈테니까." 

혼자 반주로 두병 남짓 맥주를 비운 백기가 음식점을 나와서는 그래보다 먼저 자신의 차 조수석에 올라타서 팔짱을 끼고 앉았다. 다소 어이가 없어진 그래는 한숨을 한번 쉬고 운전석에 올랐다. 시동을 눌러 켜고 좌석 옆 조작 버튼을 눌러 자신에 맞게 운전석 위치를 조정했다. 백기가 차를 얼마나 아끼는 줄 알기 때문에 매번 그 운전이 편하지는 않았는데 그런 그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앉은 백기는 술기운 때문인가 어딘가 들떠보였다. 월요일 늦은 저녁의 도심은 생각보다 그리 막히지 않았고 길이 잘 들여진 SUV는 그래가 이끄는 대로 매우 매끄럽게 미끄러져 차 안은 금세 기분 좋은 적막으로 촘촘히 차들었다. 
운전 중 슬쩍 들여다 본 조수석의 백기가 눈까지 감고 꽤나 편하고 흐뭇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잠자코 운전 하던 그래는 왠지 심술이 났다. 

“이봐요. 장백기씨. 넌 너무 나를 부려먹어. 밥 상대에 대리운전에.” 
“내가?”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웃음기를 머금은 백기가 대답했다. 


“난 가끔 너 이해하기 힘들어. 
나도 집에 꼬박꼬박 들어가서 저녁 먹는 편은 아니지만. 
난 아무나 갑자기 연락해서 다짜고짜 저녁 먹자고 하진 않아. 특히 월요일 저녁부터. 
그리고 운전도 말야. 이게 보험 문제도 있고. 아무나 이렇게 운전대 넘기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라구. 그러니까-” 

“아무나가 아니잖아.” 
“뭐?” 
“네가 아무나 일리가 없잖아. 나한테.” 
“... ...” 



벌써 오늘 저녁만 세 번째 어택이었다. 
그럼 아무나가 아니고 뭔데. 장백기에게 장그래가 대체 뭐지?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둘의 대화가 끊어져 다시 조용해진 차 안에 대신 틀어놓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는 핸들의 버튼을 이용해 노래의 볼륨을 조금 줄였다. 어느덧 일정해진 백기의 숨소리가 음악이 작아진 공간을 채워왔다. 그 소리에 집중하며 그래는 긴장으로 굳은 어깨를 풀고 좌석에 편하게 뒷목을 기댔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핸들에 가볍게 올려놓은 손가락을 두드리는 그래의 손 끝에 느껴지는 것은, 믿을 수 없게도 따뜻한 행복감이었다. 그날 밤 도로위의 달리는 차 안에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옆에 잠들어 있는, 아끼는 이의 숨소리를 들으며_ 그 숨소리에 입맞춤을 하듯 자신의 호흡을 맞추며_ 부디 그가 깨지 않길 바라며 가속 페달에서 발을 내려 놓는_ 
그 순간 순간 그래가 느낀 감정은, 분명 행복이었다. 
그래의 집은 아직 한참이나 더 달려야했다. 








+ 백기가 가져간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