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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그래] 눈썹달 01
w. volant / 볼란트








  #01. 장그래 - 바라본다. 읽는다. 말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 것도, 들지 않을 것도 없는 동네였다. 이제야 하교 후 되짚어 집으로 돌아 걸어오는- 30분 남짓한 시간이 걸리는 이 길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아직 해가 미처 다 지지 않은 푸른색 하늘을 배경으로 하나 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기다란 주홍색 가로등도 새로이 좋았다. 하나, 둘, 셋. 이대로 10개정도만 더 세어지면 집이었다.

 

  고등학교 진학 후, 엄마와 나는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오래 알고 지내던 분이 우리 집의 사정을 알고 싸게 세를 준 덕분에 여기 학교 근처, 크게 나쁘지 않은 집에서 당분간 걱정 없게 살게 되었다.

 

  “그래야,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이사 오던 날, 마당이 내다보이는 툇마루에서 배달 온 짜장면의 비닐을 뜯으며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여전히 엄마는 근근한 아르바이트로 자신을 먹이고 입히면서 어떻게든 살아내라는 법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얼마나 남았는지, 또는 자신이 이렇게 편히 학교에 다니는 것이 지나친 사치는 아닌지 물어도 언제나 명확한 답은 없었다.

 

  “넌 그냥 지금 네 할 일을 해. 그리고 이왕이면 난 네가 공부를 잘 했으면 좋겠구나.”

  가끔 돌아오는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말투는 건조했지만 그럴 때면 엄마는 손을 뻗어 위로하듯 내 손을 잡아왔다. 얼굴이며, 성격이며 어디 하나 비슷한 구석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했는데, 이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바로 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쉽게 내비치지 않는 마음과 그럼에도 서로에게 향하는 어쩔 수 없는 애정. 세상에 둘 밖에 없다는 것은 이런 의미였다. 둘은 오랫동안 서로를 위해 건강해야했고, 잘 지내야 했고, 자신의 일에 열심이어야 했다.

 

 

  7개까지 가로등을 세었을 때, 발걸음을 멈췄다. 곧장 올라가면 자신의 집을 볼 수 있을 테지만 여기서 오른쪽으로 틀어 조금만 더 올라가면 작은 공터가 있다. 머무르는 곳마다 좋아하는 곳을 만들고 그 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었기에 이 동네에 왔을 때도 가장 먼저 찾아내어 마음을 붙인 곳이었다. 하굣길에 곧장 그 곳으로 가서 1시간 정도 노닥거리고 오는 것이 요새 나의 가장 큰 낙이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민한다. 오늘은 내일까지 내야 하는 과제를 해야 한다. 마음속으로 해야 하는 일의 순위와 그에 걸릴 시간을 가늠한다. 일과를 마치면 9시 즈음에는 시간이 날 것이다. 계산을 끝낸 후 잠시 서서 눈을 감고 그 곳을 떠올린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공터, 아마도 예전에는 동네 꼬마 애들의 소중한 축구장이었을 것이다. 동네에 아이들이 줄어 이제는 자신 말고는 아무도 찾지 않는 것 같지만. 한 쪽 구석에는 무척 큼직한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었고 그 옆에 꽤 잘 어울리는 낡은 벤치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 곳에 앉으면 얼굴엔 나뭇잎 그림자가 내려앉았고 코에선 오래된 것들의 냄새가 감돌았다. 고개를 젖히면 하늘도 가까웠고 고요해서 어떤 소리에도 방해받지 않는 곳. 한 달 사이에 꽤나 사랑하게 된 장소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9시 20분. 예상보다 조금 늦어진 시각이었다. 이 시간에 이 곳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이 한밤은 또 어떤 모습일지 몰라서 공터로 향하는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자신만 아는 것 같던 그 공터에 이미 주인처럼 앉아있는 이가 있었다.

  같은 학교 교복이었다. 그리고 얄궂게도 그 앉은 뒷모습 - 머리통과 어깨선만 보고도 어렵지 않게 나는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장백기-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3월 입학식이었다. 온통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묘하게 술렁이던 그 날 아침 운동장의 분위기를 기억한다. 보통 의식은 강당에서 진행될 텐데 새로운 교장의 악취미인지 새학기 첫 등교하자마자 200여명의 동갑들과 같이 땡볕아래 운동장으로 끌려나온 터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늘자로 전학 온 탓에 아는 얼굴 하나 없이 줄의 맨 끝에 서있자니 시야에 들어오는 건 온통 점점이 까만 머리통뿐이라 정신이 아득해졌다. 새로 맞춘 교복의 칼라는 잔뜩 날이 서서 목 언저리를 계속 간지럽히고, 운동장만 나오면 집단 행동장애처럼 너나할것없이 비벼대는 운동화 밑에서는 끊임없이 모래 먼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귀하신 교장 선생님은 아직 운동장에 코빼기도 안 비치고 학생부장 선생님은 고장난 라디오처럼 끝이 없을 것 같이 200여명의 학생들에게 제식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길고 긴 제식 훈련 끝에 드디어 선서 연습이었다. 나는 당장 저 신경질이 가득한 학생부장의 목소리가 당분간은 끊겨질 것임에 감사했다. 저만치 앞에서 호명된 학생 한 명이 단상으로 올라가는 게 보인다.

  “선서- ”

  같이 오른손을 올리며 선서를 외치는데 생각보다 단정하고 힘이 있는 목소리에 눈을 가늘게 떠졌다. 저 완벽주의자처럼 보이는 학생부장의 성정으로 미뤄보았을 때 분명 처음부터 끊어내며 다시 연습시킬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짐작이 무색하게 선서의 낭독이 유려하게 이어진다.

 

  “0000년 3월 2일 입학생 대표 장 백 기”

 

  대표의 이름에 내 이름을 덧붙이다 생각지도 않게 성이 겹치자 놀라서 이름을 잇는 것도 까먹고 엉겁결에 손을 내렸다. 비슷하게 이름을 붙이는 박자를 놓친 아이들이 주위에서 웅성댔다. 원래 이런 종류의 선서는 항상 이렇게 뒤가 꼬이기 마련이다. 드디어 다시 연습시킬 꼬투리를 잡았는지 학생부장은 대표에게 선서 낭독을 재지시했다. 잠잠히 다시 선서를 낭독하기 위해 손을 드는 그 어깨가 약간 움찔거리는 것을 지켜본다. 자존심이 센 타입이구나. 아니나 다를까. 다시 선서를 외치는 목소리도 처음보다 약간 날 서있다. 지루하기만 하던 운동장은 그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호기심 어린 재밌는 장소가 되었다. 얼른 돌아선 그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그의 이름에 내 이름을 단단히 덧붙였다.

 

  장 백 기.

  장 그 래.

 

  “저 새낀가 보지. 이번 배치고사 1등인 새끼가.”

  “맞아. 나 쟤랑 같은 중 나왔어. 벌써부터 선생들이 쫙 찍었다더라. 근데 뭐, 애가 나쁘진 않아.”

  “그래? 공부를 잘하면 성격이라도 더럽던가. 키도 크잖아? 드럽게 재수 없네. 새끼.”

 

  길어지는 연습에 흥미를 잃어가던 주위 아이들도 수군대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디에서나 시선을 끄는 타입. 그 판단과 동시에 드디어 단상에서 장백기가 뒤를 돌았다. 그가 쓴 안경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1대 다수. 게다가 절대 눈이 마주칠 일이 없는 거리였음에도 나는 왠지 움찔하며 눈을 피했다. 순간 느낀 당혹감을 정리하고 다시 단상을 바라봤을 때 장백기는 이미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저 어깨, 저 안경. 분명 그 장백기였다. 내 눈이 잘 못 된 것이 아니라면. 그 때보다 어깨가 더 내려가 있긴 하지만. 플라타너스 나무 옆 벤치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은 원래 그런 목적을 위해 그 장소가 존재하는 것처럼 잘 어울렸다. 직감했다. 이 시간의 이 곳의 주인은 저 아이구나. 같은 동네에 살았나보군. 이 시간에는 여기 오면 안 되겠다. 나는 깨끗이 체념하고 뒤를 돌았다.

 

 

  “카시오페이아-”

  느닷없이 적막한 공기를 가르는듯한 장백기의 목소리가 발을 붙잡았다.

 

  “북쪽 하늘에서 볼 수 있지. W나 M자 모양이라고 하지만 나는 저걸 왕관 모양이라고 불러. 저기 가운데 별에서 위치를 잡고 저 길이의 다섯 배의 길이를 재면 북극성을 찾을 수 있어.” 


  나를 봤나. 지금 이게 나에게 하는 소리인가 싶어 뒤돌아선 그 채로 고개만 뒤로 빼끔 돌아보았다.


  “보통은 북두칠성으로 북극성을 찾는데, 나는 카시오페이아로 찾는게 더 좋더라.”


  나를 보고 있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저기 다른 사람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순간 오싹해졌다. 장백기는 지금 대체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너도 알다시피 북극성은 아주 중요한 별이거든. 달은 크고 반짝여서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찾지만 북극성은 자신의 자리가 변하지 않는 특별한 별임에도 막상 찾기가 어려우니까.” 


  장백기는 벤치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나무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눈이 미친 게 아니라면. 그 입학식 날, 배치고사 전체 1등에 빛나는, 그래서 학생들과 선생님의 기대어린 선망 속에 담담히 선서를 읽어내려가던 그 장백기가 지금 여기서 나무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하늘의 별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난 여전히 항상 변치 않는 반짝이는 것을 찾고 있어. 내게도 카시오페이아처럼 내 별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별자리가 있으면 좋을텐데.

  ... ... 오늘도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장백기의 말에 화답하듯 바람이 불어와 플라타너스 잎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그렇게 플라타너스 나무를 어루만지던 장백기가 벤치에 놓인 자신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약간 멈칫하더니 나무에게 다가가 가만히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었다. 공간을 채우던 장백기의 목소리와 몸짓이 그렇게 잠시 멈추자 시간이 멈춘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굳은듯이 멈춰버린 그 장면을 정신없이 바라보던 나는 장백기가 이윽고 입술을 떼고 움직이자 나는 얼음에서 풀린 것 처럼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얼른 근처의 구조물 뒤로 몸을 숨겼다. 

 


  타닥타닥- 가까이 다가오던 장백기의 발걸음 소리가 다시금 멀어졌다. 나는 그제야 손을 털고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까 장백기가 서있던 장소로 다가갔다. 나는 왠지 떨려오는 손을 들어 아까 장백기가 입 맞추었던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장백기의 숨겨둔 친구구나.”

 

  아까처럼 마치 내 말에도 화답하듯 다시 바람이 불어봐 플라타너스의 잎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느낌이 생경해 나는 나무를 만지던 내 손을 떼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두근 두근. 아까부터 어느때보다 세차게 뛰는 심장 고동이 손 끝까지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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