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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기그래] 눈썹달 05
    w. volant / 볼란트









    #05. 장그래 - 비 오는 날. 향기. 전화번호.    



  


「 나는. 너랑 같은 열 일곱 살. 너랑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나는 너를 입학식에서 처음 봤어. 그리고 거기서 네가 선서를 하는 바람에,

 

   나는 네 이름을 알아. 

 

 

 

 

  “장그래, 저기 장백기 지나간다.”

  “... ...”

 

 

  점심시간, 운동장 벤치에 앉아서 한참 책에 빠져 있던 터였다. 난데없는 정수 말에 조건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시선 속으로 친구들과 우르르 지나가는 장백기가 스쳐 지나간다. 순간적으로 봐놓고는 아차 싶다.

 

  “뭐야...”

  “뭐긴 뭐야. 그냥 지나간다고.”

  “나 쟤 모른다니까. 몇 번을 말해.”

  “호오... 그 말이 과연 정말인지 한번 확인해 볼까.”

 

  흐흥 하고 웃는 정수의 의미심장한 웃음이 불안하다.

 

  “뭐야.. 뭔데... 하지마.. 하지 말랬어... 이정수.. 너..!”

  “야!!! 장그래!!!!!!”

  “...!”

 

 

  “와.. 진짜 모르나보네. 저 녀석 뒤도 안 보고 그냥 가는데? ... 그런데 장그래... 너 뭐하냐...?”

 

  벤치위에 납작 엎드린 위로 정수의 비웃음이 쏟아진다. 최대한 의연하게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아... 창피해. 진짜.

 

  “흠..흠... 너가 갑자기 그래서 놀란 것 뿐이야.

  “이름도 모르는 거 보면 진짜 아는 사이도 아니구만. 이 귀는 도대체 왜 빨개지는 거야? 엉?”

  “몰랐냐? 나 이거 병이야, 병...”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애꿎은 귀를 문지르며 멀어져가는 장백기의 등을 바라본다. 그래, 서운해 할 필요도 없다. 그 이후로 우리는 그 공터에서 벌써 꽤 오래 편지를 주고 받고 있는 상태였지만 어쩐지 그는 내 이름을 묻지 않았고 나도 굳이 말하지 않았으므로 저렇게 내 이름에 전혀 반응이 없는 건 당연했다.

 

 

 



두 번째로 본 건, 네가 나를 처음 본 날과 같아.

  맞아. 난 거기서 플라타너스 나무에 입 맞추는 너를 봤어.

  그래서 그 나무가 네 숨겨둔 친구인 걸 알았어.

  그 후로 나는 계속 거기서 너를 봤어.

  나도, 그 속에 함께 있고 싶었거든.

  별자리 책 늦게 돌려줘서 미안해.

  그 책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어.

  읽고 또 읽어서,

  나는 거기에 쓰여 있지 않는 이야기까지 들은 것 같았어.

  그 책 덕분에

  나는 별을 이해했고,

  네가 만들어놓은 시그너스를, 알아 볼 수 있었어. 

 

 



 

  “하늘 봐. 구름 몰려온다. 비 올 것 같다, 장그래.”

 

 

 

  오후 수업,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본다. 학교가 높은 지대에 있어서 창문 바깥으로 바쁘고 시끄러운 회색 하늘이 잡힐 듯이 건너 보인다. 진한 구름이 일렁일렁 빠른 속도로 몰려왔다 또 물러나고 시간대보다 어두워진 시야 속에서 운동장의 플라타너스 나무들의 잎은 그 색을 더 진하게 만들었다. 바람에 유리창이 흔들리고 차갑고 무거운 빗방울이 금방이라도 가득 흘러내릴 것 같아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흙냄새 섞인 비 냄새는 이미 아까부터 더욱 더 진해지고 있었다.

 




 

 

「오늘의 인상 깊었던 일. 
  오늘 아침에 잠깐 비가 왔잖아. 
  아침에 한석율이랑 등교하는데, 
  석율이는 비오는 걸 굉장히 싫어해.
  오늘도 오면서 내내 계속 투덜투덜 거렸거든. 
  자기는 비오는게 싫다고. 
  그런데 우리 옆에 같이 걷고 있던 초등학교 꼬마아이가 
  확 뒤돌아보면서 묻는거야. 
  비오는 게 왜 싫어요? 
  비안오면 가뭄이 길어져서 나무들이 힘들단 말이에요! 
  주위에선 다들 킥킥 웃고 난리가 났지. 
  그 때 벙찐 한석율 표정이라니. 
  구구절절 맞는 말이니 아이를 붙잡고 실갱이 할 수도 없고 말야. 

  나로 말하자면 비오는 날에 별 감흥은 없어. 
  아침에 일어나기가 조금 더 힘들다는 것과, 
  교복 바지 끝단에 흙이 튀어 신경 써서 걸어야 한다는 생활감정도? 
  그런데 공터에 가서 별을 못 보는 건 좀 싫어. 
  벤치에도 앉을 수 없고... 

  너는 어떨지 궁금해. 
  너는 어때. 비오는 날. 」 

 

 

  장백기가 나의 감흥을 궁금해 하던 비가 오려는 날이다.

  장백기는 곧잘 그렇게 나를 물어와 요새 나는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냥 일상으로 해오던 것들에 나는 어떻지, 어떻게 느끼는 사람인가, 등등. 난 이럴 땐 이렇고 그런 건 어때. 장백기는 물어오기 전에 먼저 자신을 이야기 해줬다. 그래서 나는 장백기에 대해 짐작하는 것보다 아는 것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부정할 수 없이, 알게 되면 알게 될 수록 더. 좋아지기만 했다.

 

 

 

  우르르.. 쾅...!!!

  찢어질 듯한 소리를 신호로 한 드디어 시작이었다. 순식간에 교실 밖 유리창은 후두둑 빗방울이 와 부딪히는 소리로 시끄러워졌고 한밤중처럼 어두워진 사방 덕분에 교실의 형광등은 더 새파랗게 느껴졌다. 곧 종례였다. 우산을 챙겨오지 못한 녀석들의 수런거림이 교실에 가득 찼다.

 

 

  “장그래, 우산 가져왔냐?”

  “응, 엄마가. 아침에 챙겨주셨어.”

  “어, 그래. 안 가져왔으면 같이 쓰고 가자 하려고 했지.”

 

  멋쩍게 호의를 거두는 정수의 어깨를 툭 쳐주며 내일 보자고 말해준다. 이런 날은 천천히 혼자 걷는 게 훨씬 좋다.

 

 

 

「음.. 만약, 네가

  그 초등학교 꼬마처럼 

  특히 자연을 걱정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보통의 사람들처럼.

  비오는 날을 싫어한다던가, 

  또 기분이 좋지 않거나 한다면.

  말해줘.

  비오는 날, 내가 기분 좋아질 선물을 줄게. 

 

 

  그래서, 내가 답장을 뭐라 했더라. 암튼 그 이후로 처음 비가 오는 날이다. 학교 건물을 나서니 교실 안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장대비였다. 후드득 아래로 쳐지는 우산을 두 손으로 바듯이 받쳐 들고 걸음을 내딛었다. 금세 생긴 길바닥의 웅덩이들 탓에 금방 운동화가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윽---

 

  기억났다. 이 느낌. 답장에 비오는 날은 종종 이런 젖는 느낌이 들어 별로라고 썼었다. 그리고 이런 젖은 것들에서 나는 냄새도 싫다고 했었지. 나는. 뭐, 선물이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잠시 비가 가늘어진 틈을 타 우산을 어깨에 받치고 호주머니에 있던 이어폰을 빼내어 귀에 꽂는다. 솔직히 비오는 날에는 특히 좋게 들리는 노래들이 있어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 어두워지는 것이나 바람이나 깨끗해진 공기들도 흔하지 않은 것들이라 좋다. 원래 싫어하는 것보다 좋은 것들을 더 찾아보는 성격 탓이기도 했다. 귀에서 기분 좋게 흐르는 음악 덕분에 눈앞에 가득한 우산들이 일제히 리듬에 맞추어 흔들려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아, 익숙한 키. 익숙한 가방. 익숙한 운동화. 슬쩍 고개를 비껴 저 앞을 내다본다. 역시 장백기다.

 

  우산을 안 가져왔는지 한석율의 우산 한편에 몸을 접혀 들어가 있다. 이젠 종종 눈에 들어오는 저런 허점. 오늘 또 자책했겠군. 한석율의 우산은 제법 컸지만 덩치 큰 두 녀석에겐 부족했는지 장백기의 한 쪽 어깨와 가방 한 쪽이 이미 비를 잔뜩 맞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게 하굣길에 만나서 흐뭇했던 마음은 빠르게 안쓰러운 마음으로 변한다. 그러던 찰나 갑자기 앞의 장백기가 멈춰 섰다. 순간 나도 맞춰 걷던 발걸음의 속도를 더욱 늦췄다.

 

  잠시 같이 걷던 한석율까지 멈추게 한 장백기는 뒤로 맸던 자신의 가방을 앞으로 해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 후 다시 어깨에 멨다. 아... 얼핏 봤지만 확실하다. 까만 별자리 책. 장백기는 꺼낸 책을 교복 조끼 안으로 넣어 단단히 품에 안았다. 거리가 떨어져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런 장백기를 보고 한석율이 뭐라뭐라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걸음을 멈출 수가 없어 나는 대신 걸음을 더 빨리해 장백기와 한석율이 투닥거리는 옆을 지나친다. 슬슬 입 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멈출 수가 없어 입술 안을 작게 깨물어낸다. 이미 젖을 대로 젖어 감각이 느껴지지 않던 차가운 발가락들이 조금씩 간질거린다. 장백기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웬 가을비가 이렇게 많이 온다니. 이 비 그치고 나면 겨울이다, 그래야. 이번 겨울은 덜 추웠으면 좋겠구나.”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내리던 비는 10시가 넘어서야 그쳤다. 뚝뚝 처마 끝에서 미처 다 흘러내리지 못한 나머지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책상 속 깊이 숨겨뒀던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그 동안 장백기가 나에게 보낸 편지들이 들어있었다. 주로 까만 별자리 책에 끼워져 마음을 전해오는 편지. 맨 처음의 편지부터 시작해서 2~3일 간격으로 우리 사이엔 적지 않은 편지들이 오고갔다. 항상 장백기의 편지가 더 길었고 더 다양했고 더 재밌었다. 나는 이제 어떤 책들보다 장백기의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이 늘어갔다. 장백기가 편지를 써 주는 종이들도 다양했다. 편의점 영수증, 찢어낸 오답노트, 냅킨, 테이크아웃 커피 잔, 저번에는 다 쓴 두루마리 휴지심에도 깨알같이 써서 책 위에 놓아둔 적도 있었다. 짐작컨대 그냥 툭툭 마음이 동하면 옆에 있는 아무거나 붙잡고 바로바로 써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 편지들 속에서 예의 그 비오는 날에 대한 단상이 담긴 편지를 꺼내들었다. 비가 그쳤기는 한데. 이 빗속을 뚫고 왔을까. 장백기는. 머릿속에 아까 젖은 가방을 열고 별자리 책을 꺼내 소중한 듯 품에 넣는 장백기가 떠오른다. 다시 꺼내놓은 편지들을 잘 챙겨 상자에 넣은 후 공터로 가기 위해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장백기에 대해 망설여지는 것들을 버리는 연습중이다. 그 아이가, 나로 인해 실망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최악의 상상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에 관해서는 넌 웃게만, 기쁘게만 만들어주고 싶어.

 




 

  비가 내린 가을밤의 공기는 유독 차갑다. 벤치 밑에는 어제보다 플라타너스의 낙엽이 더 수북해졌다. 수분을 가득 머금어 발밑에서 자박자박 소리를 내며 물방울을 털어내듯 밟힌다. 아직 빗물이 고여 있는 벤치에 다가서자 그 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갖다 놓은 건지 물체를 손으로 들어 올리자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게 뭐야.. 장백기.”

 

  어찌나 비닐로 돌돌돌 감싸고 뽁뽁이로 둘러놨는지 한참을 낑낑대며 풀어 내어 결국 작은 검정 종이 상자를 발견했을 때는 허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딸각 검정 종이 상자를 열자 부드러운 향이 먼저 코에 닿았다. 상자 안엔 별 것이 없었다. 메모지 한 장이 둥그렇게 갈색 리본에 매여 있었다. 향기는 갈색 리본에서 나고 있었다. 향기가 매우 진해 원래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끈임을 알아챈다. 비오는 날의 냄새가 싫다 했던 말을 기억했나보다. 서로에게 준 말을 상대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이렇게 기쁜 일인 거구나. 리본을 슬쩍 매만지자 손에 온통 부드러운 가을 냄새가 넘어온다. 

  한참을 그렇게 손에 리본을 감아가며 흐뭇해하고 있을 때 리본이 묶고 있던 작은 메모지가 팔랑거리며 밑으로 떨어졌다. 그냥 종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작게 무엇이라 메모된 것이 보여 얼른 낙엽위에서 주워들었다.

 

 

 

  010 - 0000 - 0000

 

 

  이번엔 손가락에 감아놨던 리본이 아래로 툭 떨어진다.

  낯익지 않은 11자리의 숫자가 무엇을 말하는 지 안다. 순간 바람이 불어와 손바닥위에 놓인 메모지가 날아갈 것 같아 꽉 손을 움켜쥐었다. 바닥에 떨어진 끈을 주워들어 호주머니에 넣고 종이를 쥔 손을 움켜쥔 채로 나는 달리듯이 공터를 뛰어 내려왔다.

 

 

 

  장백기의 방은 아직 환했다. 넌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모르지만. 나처럼 내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어. 환한 빛이 새어나오는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장백기 집 앞에 있는 공중 전화박스에 들어가 기계에 동전들을 채워 넣었다. 이미 외워버린 11자리의 숫자를 천천히, 하지만 망설임 없이 눌렀다. 신호음에 따라 심장소리가 점점 커지는 게 느껴진다. 나는 내가 그만 수화기를 내려놓을 것만 같아 대신 눈을 꽉 감았다. 

  딸깍--. 동전이 넘어가는 소리에 눈을 떴다. 

 

 

  “... ...”

  “... ...”

 

  “어때, 선물은 맘에 들었어요?”

 

  잠시간 서로의 침묵 끝에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장백기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어쩐지 그 말끝에 웃음이 섞여 있어 나는 우선 대답 대신 작게 웃었다. 하... 다행이야. 나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고 있어? 내게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항상 너야. 나는 주머니에서 장백기가 준 향기 나는 끈을 꺼내 가슴 가득히 시원한 가을 비냄새와 섞여 드는 진한 향을 맡았다.

 

 


 

 

  “응, 아주 맘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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