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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기그래] 눈썹달 04
  w. volant / 볼란트





  #04.장그래 - 아프다. 배를 매다. 편지. 




 

  “그래야, 일어나봐라. 아니 얘가 왜 이렇게 식은땀을...”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걱정스럽게 들여다보고 있는 엄마의 눈동자와 마주친다. 나와 닮은 담갈색 눈동자가 깜박이는 것이 마치 슬로우를 건 듯 느린 속도로 인식된다. 다정한 눈과 마주친 것만으로 끝을 알 수 없던 깊이의 꿈에서 구원 받은 것 같아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그러고 보니 눈 주위로 온통 뜨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모든 게 무거워 손을 들어 가득 고인 눈물을 몰래 훔쳐낼 수도 없었다. 도저히 목소리도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엄마는 내 눈썹 언저리에 손을 얹으셨다. 약간 까칠한 촉감의 두터운 손이 내려앉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닦아내지 못한 눈물이 그대로 넘쳐 죽죽 얼굴 위를 흘러내리는 것을 느낀다. 다시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든다. 날이 밝은 것 같았는데... 일어나서 학교에 가야하는데. 가서, 언제나 그랬듯 나는 너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쫒고. 그래야 이 무거운 것들이 조금은 사라질 텐데.

 

 

 

  “생전 아픈 일 없던 애가 왠일인지 모르겠네. 일어나야 병원이라도 가 볼 텐데. 여기 죽하고 전에 엄마가 지어놨던 감기몸살 약 좀 먹자. 오늘도 학교 빠졌는데 내일은 가야지.”

 

  저녁이 되서야 겨우 죽 몇 숟갈과 약을 삼킨 후 다시 자리에 누웠다. 엄마 말대로 이렇게 아파본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학교를 빠지다니. 장그래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자로 잰 듯 한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암묵적으로 동의된 규칙들을 어기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듯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는 늘 약간 강박에 가깝게 정돈하고는 했다. 그건 아버지 없이 혼자 자신을 키우는 엄마에 대한 내 나름의 위로방식 이기도 했다.

  결석이라니. 막상 해버리자 두려움보다는 일종의 쾌감에 가까운 기분이 드는 것이 이상해. 학교에 결석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무섭거나 그다지 큰일은 아니구나. 그러고 보니 그 밤에 장백기 얼굴도 빨갛고 기침도 했었는데, 괜찮을까. 다시 장백기 생각을 하자 지끈지끈 대기 시작하는 이마를 시원한 베개에 비볐다.

 

 

  “아... 죽겠다, 진짜...”

  

  알 수 있다. 이렇게나 마음이 달아오르니 몸도 달아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백기의 모습, 얼굴, 표정, 몸짓, 언어, 말투... 내가 그에 대해 기억하고 머릿속에 특별한 부분으로 옮겨놓은 모든 것들이 시간이 갈수록 나를 달아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겪어 온 어떤 일보다 속도가 빨랐지만 그 향방은 짐작할 수 없던 마음이 점차 장백기의 말을 따라 방향이 점차 확실해졌다. 변하지 않는 것, 북극성, 그의 시그너스.

  나는 결국.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이 그에게 가 닿아서 무언가가 되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마음이 커져버렸을까.

 

 

  “...뭐... 짝사랑이네.”


  달뜬 숨과 함께 목에 걸린 가시를 뱉어내듯 마음에 걸린 낱말을 발화한다. 생각보다 메마르게 말이 튀어 나온다. 그러니까 이건 오늘 내가 저지른 결석이라는 행위와 느낌이 비슷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동안의 장그래는 그래서는 안 되는 종류였던 어떤 일. 하지만 이렇게 선을 넘고 나니 그 담의 높이가 얼마나 낮았던가를 실감하게 되고, 또 그 앞에서 넘지 않기 위해 그간 부단히도 노력했던 일들이 우스워지는 그런 일.

 

 

  책에서 읽었던 짝사랑들의 결과가 어떻게 되더라. 막상 대입해보려니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로맨스 책을 즐겨 읽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도통 짝사랑의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짝사랑이 없다면 사랑이라도. 다시 사랑에 관한 글귀를 떠올려 봐도 역시 캄캄하다. 세상의 수많은 작가들이 사랑을 쓰고 노래했건만. 왜 나는. 걷는 걸 빼면 자신의 유일하다시피 한 자신의 취미가 바로 책을 읽는 것임에도. 열심히 지금 생각나는 책들의 페이지를 아무리 넘겨봐도 자신의 마음을 은유할 한 문장도 쉽게 떠올리지 못하자 나는 한츰 더 침울해졌다. 오랜 시간 내 마음을 위로해주었던 그 많은 나의 책들은 바로 손으로 만져질 것 같이 실재하는 이 감정 앞에서 모두 반짝이는 그 빛을 잃었다.

 

  이렇게 나도 다 읽어지지 않는 내 마음을 내가 너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을까. 점점이 퍼지는 까만 걱정들 사이로 약기운이 스며든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생각의 끈을 다시 놓쳐버리고는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문득 주위가 생각보다 환한 것에 놀라 푸드득 잠에서 깬다.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자 머리 맡 물이 담긴 컵 옆에 놓인 작은 쪽지가 보였다.

 

  「영 세상 모르고 자서 깨우지 않았다. 학교에는 오늘까지 쉰다고 말해놓았으니 일어나면 밥 챙겨먹고 가까운 병원에 다녀 오거라.

 

  황급히 핸드폰을 확인하니 벌써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금부터 서두르면 오전 수업 끝에는 교실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일어나서 서둘러 학교 갈 준비를 했다. 거울에 비치는 생각보다 못쓰겠는 얼굴에 혀를 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병원은 들리지 않아도 된다. 아마 학교에 다녀오면 훨씬 나을 것이다.


  이런 시간대에 학교를 가보는 건 처음이었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교복차림으로 이 시간에 거리를 걷는 자신을 이상하게만 보는 것 같아 자꾸 몸이 움츠러 들었다. 장백기도 오늘 아침 이 비슷한 경로를 밟아 등교했을까. 밝은 햇빛 아래서의 장백기와는 좋은 기억이 없다. 자신의 손에서 시계를 낚아채가던 서늘한 온도가 기억나 손이 차가워진다. 플라타너스 벤치 앞에 돌멩이로 시그너스를 놓던 장백기 손의 온도는 분명 그것보다 높을 것이다. 기침을 해대던 그 날의 장백기에 생각이 닿자 마음이 바빠져 걸음이 빨라진다. 곧 교문이었다.

 

 



  “야, 장그래. 너 어떻게 된 거야. 연락도 다 씹고. 죽은 줄 알았잖아. 담임한테 물어봤더니 아파서 빠졌다고 그래서. 이젠 괜찮냐?”

  “좀 앓았어. 연락할 새도 없었다. 걱정시켰다면 미안.”

 

  교실에 들어서자 내 이름을 부르며 두 어깨를 얽어 내리 누르던 정수가 내 말 끝에 팔을 풀고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왜.”

  “아팠던 건 맞나보네. 더 날카로워서 돌아왔잖아. 장그래. 요새 좀 무뎌지나 했더니.”

  “내가?”

  “그래. 너 칼같이 선 긋는 거. 본인이 모르진 않을 테고. 그래도 그나마 친하다는 내가 지 조금만 만져도 삐쭉삐쭉 난리도 아닌 애가 장백기 볼 때는 가시 다 빠진 얼굴을 해서 맥 빠지게 만들더니 이제는 사이좋게 결석도 같이 하고 말야... 그러니 내가..”

 

  “잠깐, 장백기? 장백기가 왜?”

  “몰랐어? 장백기도 어제부터 결석중이야. 그 새끼는 오늘도 안 나왔던데. 그 바람에 문학 꺼 대회 못 나갔다고 문학이 하도 지랄지랄대서...

  가족여행인가 갔다던데 소문에는 문학 엿 먹으라고 일부러 그랬다는 말도 있고. 다들 의견이 분분하더라고.”

 

  장백기가 결석이라니. 자신만큼이나 그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왜 결석했을까. 역시 그 얼굴은 몸이 안 좋아서였을까.

 

  “어쨌든 장그래, 나와서 얼굴 보니까 좋네. 맞다. 다음 시간 문학이야. 문학책 꺼내놔. 미리 안 꺼내놓으면 지랄하잖아. 요새 특히나 심기가 불편 하시다니까.”

  “아.. 응.”

 

  자리에 앉아 멍하니 책가방을 뒤지는 손가락 끝에 익숙한 촉감을 가진 책이 먼저 걸린다. 슥 꺼내자 까만 별자리 책이 별다른 저항 없이 끌려 나왔다. 책을 꺼내 손을 얹고 있자 까만 불안감이 책에서 손으로, 손에서 마음으로 옮겨온다.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어 책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혹시 정면으로 마주칠까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던 4층 복도였다. 기세 좋게 올라온 것 까진 좋았는데 웅성웅성 아이들이 모여 있다 흩어지는 그의 교실 앞문에서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거기 너. 1학년 맞지? 왜? 누구 불러줄까?”


  낯선 목소리가 초조한 귀에 와 닿는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웃음기 있는 저 얼굴은 분명히 낯이 익다. 그리고 사람을 대답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목소리. 역시. 누가 장백기 친구 아니랄까봐.

 

  “저. 장백기... 오늘 결석이야?”

  “백기? 어.. 그 녀석.. 결석 맞아. 그거 확인하러 온 거?”

  “아... 응.. 혹시... 왜 결석 했는지 알아?”

 

  “그 전에. 장백기는 어떻게 알아? 장백기 친구 중에 내가 모르는 애는 없는데. 넌 영 낯설어서.”

  “ ... 친구 아냐.”

  “그럼?”

 

  그러게. 친구 아님 뭐지. 여기서 나는 네 친구를 짝사랑하고 있는 애야. 라고 말하면 저 웃고 있는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까. 상상되는 그 얼굴대로 지금 내 얼굴이 굳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마주한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가셨다.

 

  “아, 미안. 추궁하려던 건 아냐.”

  “그래.”

  “잠깐, 미안하니까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난 한석율이라고 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녀석 오랜 친구거든.

  뭐 녀석의 이번 결석의 대외적인 명목은 가족여행이지만 말이야. 사실은 장백기 지금 아파. 뭐, 환절기마다 메인 이벤트지. 며칠씩 결석할 정도로 앓아내는 거. 알아두라고. 한 녀석쯤 더 알고 있는 것도 괜찮겠지. 병은. 자고로. 소문이 나야. 낫는다잖아.”

 

  한석율은 마지막 문장을 곱씹듯이 끊어 내뱉는다. 살피고 있는 걸 알면서도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사정없이 눈빛이 흔들린다. 그 밤, 뒤를 밟는 제 앞에서 미세하게 내려가있던 어깨와 힘없이 끌리던 발걸음. 역시 아픈게 맞았어. 마치 확인사살을 받은 듯 가슴에 통증이 느껴진다.



  “그 눈빛. 반신반의로 말해본건데. 너. 걱정하는구나, 그 녀석.”

  한석율이 예의 그 웃음을 다시 얼굴 전면에 띄우며 말을 잇는다. 

 

  “처음에 까칠하게 말한 거 미안. 워낙 별별 새끼들이 다 꼬이는 녀석이라. 백기 그렇게 한 번씩 터질 땐 아무도 옆에 안 둬. 가족들도 자리를 피해 줄 정도니 말 다했지 뭐. 올해는 잘 넘어가나 했더니 어김없네. 누가 지 아픈 거 아는거 질색팔색해서 티도 못 내고. 지금도 혼자 있을텐데, 아마.


  호기심을 감추지 않는 한석율의 시선 끝이 마주보던 내 눈을 비켜 내 손에 쥐고 있는 까만 책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지켜본다. 그 눈에 당황한 기색이 어리는 걸 보며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책을 든 손을 뒤로 숨겼다.

 

  “너, 그거...”


  때마침 울린 시종을 신호로 난 그대로 뒤돌아 반으로 뛰어 내려왔다. 교실로 들어와 의자에 앉자마자 앞문으로 문학 선생님이 들어왔다. 착착착--- 앞에서부터 하얀 프린트물이 뒤로 넘겨져 왔다. 넘어온 프린트물을 받아 책상에 올려놓은 뒤 그 옆에 별자리 책을 올려 놓았다. 그제야 참았던 숨이 겨우 쉬어졌다.

 

  “자, 오늘은 시 단원 보충할거다. 작년 모의고사에서 다뤄졌던 유형의 시 위주로 뽑아왔으니까 보면서 경향 정리하자. 1번 시부터. 누가 읽어볼까. 이 반 제일 끝 번호. 한 번 읽어봐.’

  “장그래, 31번. 네가 가장 끝 번호잖아.”

 

  정신없이 숨을 고르고 있다가 옆에서 정수가 옆구리를 찌르자 엉겁결에 프린트물을 손에 쥐고 일어나 시를 읽어 내려갔다.

 

 

 


 

 

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시를 다 읽고 프린트 위로 투두둑 떨어지는 눈물에 놀라 고개를 들자 교실에 있는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파도에 흔들리듯 내가 딛고 선 바닥이 울렁대며 흔들리는 느낌에 울컥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아... 안 돼. 나는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교실을 뛰쳐나왔다. 거칠게 화장실 문을 열어젖히고 움켜 잡은 변기 속으로 속에 있는 것을 게워냈다. 한참 후에나 간신히 변기 물을 내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도 내 한 손에 그대로 딸려온 까만 책을 확인하자 자조적인 웃음이 튀어나왔다.

 

  「정수야. 나 몸이 안 좋아서 이대로 조퇴할게. 어차피 담임은 오늘까지 나 결석인 줄 알거야. 내 가방만 사물함에 좀 넣어 놔줘. 미안.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가 다시 움직여 문자 끝의 ‘미안’ 이라는 낱말을 지우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정신 못 차리게 나를 휘감았던 열이 조금 진정되기를 기다려 옷을 털고 일어났다. 할 수 있다면 지금. 바로. 아까 읽었던 시를 다시 한 번 읽고 싶었다. 걸을 수 있을까. 서점에 닿을 때까지 내 체력이 버텨줘야 할 텐데. 내뱉어지는 숨이 뜨거워 나도 모르게 이를 악 물었다.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빼곡히 들어차있던 서점의 책장 속에서 찾던 책의 제목을 찾아낸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얇은 그 책을 뽑아 들고 그만 자리에 주저앉는다. 서점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은 뒤 서둘러 맨 앞 목차에서 제목을 확인 후 페이지를 찾아 펼쳤다. 그리고는 그 하나의 시를 읽고 또 읽어 내려갔다.

 

 

  “그 시가 학생 마음에 들어요?”

  옆에 누가 오는 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시에 빠져있던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지나치게 놀랐다. 처음 듣는 서점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마음에 들면 데려가요. 그 녀석도 너무 오래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거든.”

  “하지만... 저 지금 지갑이 없어서...”

  “우리 집 오랜 단골이니까 그냥 주고 싶은데... 값을 치루고 싶다면 그것도 좋지. 다음에 와서 돈은 내더라도 책은 오늘 가져가요. 

  사람이 헤맬 때는 나침반이 필요한데, 그 책이 지금 학생에게 절실해 보이니까.”

 

 

 

 

 

  지칠대로 지친 걸음으로 며칠만에 찾아온 공터는 그대로 조용했다. 얼마나 변한 게 없었냐면 벤치 앞에 백기가 만들어 놓은 시그너스의 돌멩이들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어지러운 머리로 꼭 그 시간으로 되돌아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두렵기도 했고 행복하기도 했던 그 밤. 나는 벤치에 털썩 앉아 손에 들고 있던 두 권의 책을 무릎위에 놓았다.

 

  장백기의 책. 까만 별자리 책.

  장그래의 책. 하얀 시집.

  

  하얀 시집을 펴서 온종일 나를 뒤흔들었던 시를 다시 읽어본다. 예전에도 읽어본 기억이 있는 시다. 이 시가 지금에서야 내게 이렇게 절실하게 또 다른 의미를 갖는 이유는. 지금 이 시와 나 사이에 전에는 없던 장백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럴 일도 없다가 갑자기 내 등 뒤로 날아온 밧줄 같은 장백기. 외로운 장백기. 아픈 장백기. 옆에 사람을 두지 않는 장백기. 나무와 친구이면서 별을 이야기하는 장백기. 변하지 않는, 시그너스를 찾고 있는 장백기. 그렇게 내게 묶인 장백기가. 온종일 내 울렁대는 마음 위에 떠있기 때문이었다.

 

  북--

  망설임 없이 나는 그 시가 적힌 페이지를 시집에서 찢어냈다. 그리고는 별자리 책을 펴 시그너스 부분을 찾아내 뜯어낸 시가 적힌 종이를 페이지 사이에 끼우고 덮는다. 그리고 벤치에서 일어나 앉아 있던 곳에 내가 처음 발견했던 그대로 장백기의 까만 별자리 책을 돌려 놓았다. 여기서 주운 이후로 한 시도 옆에서 멀리 두지 않았던 책이었다. 망설여지는 시선을 거두고 장백기의 시그너스를 다시 한 번 눈에 담고, 플라타너스 나무 앞에 섰다. 여느때와 같이 까슬하면서 매끈한 감촉이 싫지 않게 손끝에 스친다.  


  “부탁이야. 할 수 있다면, 장백기가 얼른 괜찮아지게 해줘. 그리고... 오늘 내가 한 일을... 제발 후회하지 않게 해줘...”


  그리고는 그대로 돌아보지 않고 공터를 내려왔다. 과감하지도 소심하지도 않은, 장그래다운 고백이었다. 

 

 

 


  그 다음 날도 장백기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수업시간, 쉬는 시간 할 것 없이 내 정신은 온통 저 수백 미터 멀리 떨어진 공터의 벤치위에 쏠려 있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열이 올랐다. 정수는 그런 나를 보며 아직 다 낫지 않은 것 아니냐며 걱정을 했다. 장백기는 좀 나았을까. 과연 공터에 왔을까. 그 책을 장백기가 봤을까. 더 이상 그에게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존재가 되기는 싫었다. 너를 보고 있는 내가 이렇게 이런 마음으로 여기 있어. 이런 내 고백을. 과연 그가 확인했을까.

 

 

  학교가 끝나자마자 뛰다시피 해서 동네 공터로 올라왔다. 저기 익숙한 플라타너스 나무와 벤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가슴이 아플 정도로 뛰었다. 심장께를 움켜쥐며 벤치로 다가갔을 때, 나는 어제 내가 두고 온 그대로 장백기의 책이 놓인 것을 보았다.

  하루 종일 날카롭게 당겨져 있던 정신줄이 탁- 하고 풀리는 느낌에 그만 벤치에 주저앉았다. 내내 모습을 바꿔가며 나를 괴롭혀댔던 생각들이 그저 잔인한 망상이 되어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미쳤나 보다, 장그래...”


  생각보다 강력한 허탈감에 이어 엄청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어제는 정말 내가 미쳤었나봐. 아무래도 이건 안 되겠어. 그냥 한석율을 통해 책만 돌려줘야지. 책을 집어들어 종이를 빼내기 위해 페이지를 넘겼다. 좌르륵 넘어가던 페이지는 종이가 꽂혀진 곳에서 멈췄다. 하지만 그 종이는 어제 내가 찢어낸 시집이 아닌 다른 종이었다. 의아함에 들여다본 하얀 종이에는 익숙지 않은 필체로 쓰여진 글씨들이 가득 차 있었다. 설마. 이건. 아냐... 거짓말... 거짓말이야. 나는 얼른 책을 덮어버렸다. 두근두근. 누가 볼세라 꽉 책을 끌어안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기분이 이상하다. 울고 싶기도 하고 큰 소리로 웃고 싶기도 했다. 아니, 나는 그만 하늘에 대고 의미없는 고함이라도 외치고 싶었다. 한참을 미친 사람처럼 플라타너스 나무 주위를 맴돌다가 결국 벤치에 발라당 누워 책으로 얼굴을 덮었다. 하루동안 내게서 떨어져 있던 그의 책에서는 꼭 그의 체취같은, 전에 없던 향기가 맡아졌다. 그조차도 견딜 수 없이 고맙고 사랑스러워 책에 코를 묻고 가슴 깊이 숨을 들어마셨다. 두근두근.이러다가... 가슴이 터져버리는 건 아니겠지. 


 

  To my Cygnus. 

 책을 덮기 전 기어코 눈에 와 닿은 편지의 첫 머리. 온종일 이 모든 일들을 지켜봤을 플라타너스 나무 위로 부쩍 짧아진 해가 지고 어느새 저녁하늘에는 하나, 둘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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